서울시 표석을 답사 하다보면 유사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나루터이다. 서울에는 한강이 가로 지르기 때문에 나루터가 발달할 수 밖에 없었을테니 많은게 당연하다. 그런데 나루터 표석을 보면 어떤 것은 돌로 멋드러지게 잘 만들어 세운 반면 요즘 세운 노량진 터 같은 경우는 품위도 없고 너무 초라하게 보인다. 또한 그 위치도 어떤 나루터는 한강변 즉 한강둔치에 세운 반면 어떤 나루터는 둔치를 벗어나 평지에 세운 것도 부지기수다. 지형관계로 한강둔치나 강변에 세울 수 없었다면 그 내막을 간략히 써놓으면 좋겠다. '나루터는 이곳으로부터 30미터 전방 강변에 위치한다.' 이런 내용이 들어가야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양화진 나루터는 절두산성지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데 잘 보이지도 않는다. 이곳을 답사하려면 차로 진입하기는 어려우므로 절두산성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 등을 한꺼번에 답사한다고 생각하고 절두산성지 아래 한강둔치 쪽으로 내려가서 답사하면 좋을 듯 싶다.
▣ 양화진(楊花津) 양화나루, 양화나루터
양화대교 북단에 있던 나루터로서, 한강도와 아울러 고려 때부터 중요한 도선장의 하나였으며 조선 초에 이미 도승이 배치되었다. 양천을 거쳐 강화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강화가 교통, 관방상으로 중요시 되던 당시에 있어서 그 비중은 매우 컸다.
양화도에서 보유한 진선은 10척 내외의 관선과 이와 별도로 사선의 나룻배도 있었다. 연산군 때는 노량도 외의 모든 진도를 금하고 진선은 모두 동원되어 국왕의 뱃놀이에 사용되어 양화도 역시 쇠퇴하였다.
중종 초기의 기록에 의하면 나루를 건너고자 하는 사람은 많고 진선은 단지 2척 뿐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먼저 건너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갖고 한꺼번에 승선하기 때문에 자주 침몰 사고가 일어났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어영청으로 하여금 이곳에 별장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때 양화진에 비치된 진선은 9척이었다.
양화진 별장은 인근의 공암진, 철곶진까지 관장하였다. 양화도 일대 역시 경치가 좋아서 중국의 사신이 오면 종종 이곳에서 선유를 베풀었으며, 사대부들의 별장도 많았다고 한다.
<서울지명사전에서 인용>
▼ 양화진 나루터(楊花鎭津址) 표석
▼ 양화나루 안내판
▼ 양화진 나루터(楊花鎭津址) 표석
▼ 양화진 나루터(楊花鎭津址) 표석은 절두산성지를 답사한 후 한강둔치로 내려가야 볼 수 있다.
▼ 양화진 나루터(楊花鎭津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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