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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활인서 터(西活人署址) 

 

2020년말에 서울시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그 사이에 새로 설치된 표석이 2020년 4곳이 추가 되었다. 또한 내용이 바뀐 표석도 내가 파악하기로는 10여곳이 넘는다. 날 잡아서 다시 답사를 진행하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오늘 동방대학원대학교 풍수지리 수업이 끝나고 평창동 갈 일이 있어서 평창 터를 답사했고, 이어서 서활인서터를 답사했다. 모두 차량 접근이 용이해서 두곳을 먼저 다녀온 것이다. 다른 곳은 자전거나 도보로 접근해야해서 시간이 더 걸릴것 같다.
서활인서터는 동활인서터와 동일하게 바뀐다고 예전에 들었었는데 이번에 확인해보니 그 사이에 내용이 약간 바뀌었다. 참고로 성북구에 있는 동활인서 터 내용을 옮겨본다. 
「활인서는 조선 초기 전염병 환자와 가난한 환자를 치료하려고 서울의 동쪽과 서쪽 두 곳에 설치한 관청이다. 동활인서는 동소문 밖에 있었고, 서활인서는 서소문 밖에 있었는데 1882년(고종 19) 폐지되었다.」
서활인서 터는 위치는 그대로 아현중학교 정문 앞에 있고 내용만 바뀌었는데 표석은 대리석으로 그대로 사용했고 내용은 돌이 아닌 것으로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금새 색깔이 바뀌다보니 장기적으로는 돌로 하는게 좋을듯 보인다. 단 면밀한 검증을 해서 다시 바뀌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몇년전에 동활인서터 내용을 바꾸면서 바뀐 내용이 서활인서 터 내용을 바꾸면서 또 바꾸면 믿음이 가겠는가?
물론 틀린 내용을 기록할 수는 없지만 다소 미흡한 내용일지라도 큰 틀에서 무방하다면 함부로 표석을 바꾸는 일은 앞으로 없어야 할듯 보인다. 예산낭비도 그렇고 시민들의 정보공유 측면에서도 너무 정신 없을 정도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활인서 표석 주변이 예전 답사 때는 아파트공사로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보여서 다행이었다. 이곳은 답사하기 아주 쉽다. 대로변에 위치하고 특히 아현중학교 정문에 있기 때문에 맘만 먹으면 답사하기는 쉽다.

 

 



활인서(西活人署)

 

조선시대 도성내의 병인을 구료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던 관서.

1392년(태조 1) 7월 고려의 제도에 따라서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두어 병자와 갈 곳이 없는 사람을 수용하여 구활하였는데, 관원으로 부사(副使) 1인, 녹사(錄事) 2인을 두었다.1414년(태종 14) 9월 불교의 명칭을 벗고 동·서활인원으로 개칭하였는데, 그 위치는 『세종실록』 지리지 한성부조(漢城府條)에 동활인원은 동소문 밖에, 서활인원은 서소문 밖에 두어 도성내의 병자와 오갈 데 없는 사람을 치료하고 의식을 지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466년(세조 12) 1월 동활인원과 서활인원을 통합하여 활인서로 고치고 참봉 1인을 가설하였는데, 『경국대전』의 활인서 관제는 태종부터 성종까지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확정된 것이다. 즉, 제조(提調) 1인, 별제 4인, 참봉 2인, 서리 4인이고 참봉과 의원은 체아직(遞兒職)이며 1년에 두 번 도목(都目)을 거쳤다.『육전조례』에는 위의 관원 외에 이례(吏隷)로 서원(書員) 2인, 고직(庫直) 1인, 사령 5인, 구종(驅從) 1인을 두었다. 활인서는 임진왜란 때 일시 중절되었으며 1882년(고종 19) 폐지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산전에서 인용>

 

 

▼ 서활인서(西活人署) 터 표석

▼ 서활인서(西活人署) 터 표석... 아현중학교 정문 앞에 있다.

▼ 서활인서(西活人署) 터 표석... 맞은 편 아현아이파크는 예전에는 공사중이었는데 지금은 말끔하게 완공되었다.

▼ 서활인서(西活人署) 터 표석

▼ 서활인서(西活人署) 터 표석 위치

▼ 서활인서(西活人署) 터 옛 표석... 자료를 위해 남겨둔다.

▼ 서활인서(西活人署) 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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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