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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6. 11. 제 다음블로그에 올린 내용을 티스토리로 옮겨옵니다.>

둔촌 이집 묘역

 

성남에 있는 둔촌 이집선생의 묘와 후손 묘를 한꺼번에 답사했다. 성남시에 있는 묘를 답사하면서 몇개씩 답사하다 보니 전체적인 묘역 파악이 잘 안되고 못가본 곳이 여러곳 있어서 성남시묘역 완전정복을 위해 전체 묘를 파악한 후 구역별로 세번에 걸쳐 답사를 완료하였다. 그래도 못가본 곳이 몇곳 있어서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둔촌 선생 묘역을 먼저 간 후에 후손 묘를 가야되는데 동선상 후손 묘를 먼저보고 나중에 둔촌선생묘를 찾게 되었다. 답사할 당시에는 날씨가 변덕이 심해 눈발이 날리기도하고 빗줄기가 보이기도 하고 정신없이 왔다갔다 하면서 답사를 하느라고 힘든 날이었지만 그래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어 다행이다.

 

이집(李集)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에 있는 남원윤씨의 묘역. 
조선시대 이 지역에 세거하였던 남원윤씨의 선영으로, 조선 전기의 문신 윤극신(尹克新)과 그의 아들 윤돈(尹暾)과 윤엽(尹曄), 윤돈의 아들 윤형철 등의 묘소가 안장되어 있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 활동을 했던 윤재옥의 묘가 있다. 
남원윤씨 묘역은 성남시 수정구 금토동 산44[달래내로221번길 16] 일원 능안골에 위치한다. 윤재옥의 묘는 인접한 주택가 내에 정동향하여 있다. 
조선시대에 조성된 윤극신, 윤돈, 윤엽, 윤형철의 묘는 모두 북동향이며, 원형의 쌍분(雙墳) 형태이다. 묘역의 석물은 대부분 원래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어 시대에 따른 석물의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묘표는 형태상 비좌와 비신 월두형(月頭形) 및 비좌, 비신, 8작 지붕 모양의 지붕돌[옥개석]의 두 가지 형태로 단순하다. 봉분 중앙에 원래의 묘표가 위치하나, 이와 별도로 봉분 좌측에 일률적으로 근래에 마련한 묘표를 세워 놓았다. 비신의 비문은 문장에 능하였던 직계 후손들과 후학이 직접 짓고 써서 세워 놓았다. 1327년(충숙왕 14)∼1387년(우왕 13). 고려 말기의 학자‧문인.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원령(元齡). 자는 호연(浩然), 호는 둔촌(遁村). 광주 향리 이당(李唐)의 아들이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문장을 잘 짓고 지조가 굳기로 명성이 높았다.
1368년(공민왕 17)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자, 가족과 함께 영천으로 도피하여 고생 끝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1371년 신돈이 주살되자 개경으로 돌아와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여주 천녕현(川寧縣)에서 전야(田野)에 묻혀 살면서 시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그의 시에는 꾸밈과 우회보다는 직서체(直敍體)에 의한 자연스럽고 평이한 작품이 많다. 그는 당시 임심문(任深文)을 비롯한 60명에 달하는 많은 인물들과 시로써 교유하였다.
특히,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과의 친분이 두터웠다.
문집 부록에 실린 삼은(三隱)의 기(記)‧서(序)‧서(書)는 그와 삼은과의 관계를 잘 알 수 있게 하여준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그가 조선조에 벼슬을 지냈다고 잘못 기록되어 있는데, 1611년(광해군 3) 8대손인 영의정 이덕형(李德馨)의 주청이 받아들여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바로잡혀지게 되었다. 광주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둔촌유고》가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지정 경기도 기념물 제219호
문화재명칭 둔촌 이집 묘역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 243-1
관리자(연락처) 광주이씨

 

고려 충숙왕 14년(1327)인 정묘년에 출생하여 고려 충목왕 3년인 정해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해박한 학문과 고상한 지절로 이름이 울려 퍼지니 포은 정몽주, 목은이색, 도은 이숭인과 같은 여러 명헌들도 모두 존경하며 교류하였다.
공민왕 17년인 무신년에는 신돈을 오역<나무라고 거스린다는 말> 한 까닭에 앞으로 반드시 닥쳐올 화를 미리 예측하고 노부를 업고 도망하여 과거동기인 영천 최원도의 집에서 은거하다가 공민왕 18년인 기유년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서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면서 영천군 나현자좌에 안장했다.
공민왕 이십년인 신해년에 신돈이 실각된 후에야 비로소 송경 용수산 밑 현화리 옛집으로 돌아왔다. 뒤에 벼슬을 버리고 여주 천령현으로 낙향하여 많은 은둔지사들과 교류를 하였다.
우왕 13년인 1387년에 사망하였다. 벼슬은 봉순대부 판전교사사를 지냈으며 조선조에는 의정부좌찬성의 직을 내렸다. 시고 2권이 전하여지고 있다. 조선현종10년(1669)에 여러사람들이 그 유덕을 추모하여 광주암사 강상에 서원을 세우고 춘추로 제향을 모시러 오더니 숙종 정축(1697)년에는 구암서원이라는 액자가 하사되었다.<성남시 문화관광사이트>


 

광주이씨 가계도

                 
둔촌
이집
  탄천
이지직
  이장손   이극규    
         
                 
        이인손   이극배
영의정
  이세광
           
            이극감   이세우
             
            이극증    
               
            이극돈   이세정
             
            이극균    
               
                 
        이예손   이극기    
             
            이극견    
               

 

▼ 둔촌 이집선생 신도비. 

▼ 둔촌 이집선생 묘 안내판

▼ 둔촌 이집선생 묘 문화재 안내

 ▼ 둔촌 이집선생 재실

 

 

 ▼ 둔촌 이집선생 묘역 입구

 ▼ 일반 묘와는 달리 묘 백호쪽 입구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청룡쪽에 세운다

▼ 둔촌 이집선생 묘비와 행적비

 

▼ 둔촌 이집선생 묘 전경

▼ 둔촌 이집선생 묘

▼ 둔촌 이집선생 묘 석물

▼ 망주석이 아주 특이하다...

 

 

 

▼ 둔촌 이집선생 묘 장명등

 

▼ 둔촌 이집선생 묘 상석

▼ 둔촌 이집선생 묘표

▼ 둔촌 이집선생 묘 입수도두... 날씨가 좋지 못해 맥을 확인하지 못했다.

 

▼ 둔촌 이집선생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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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