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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26. 제 다음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옮겨옵니다.>

 

나주정씨 월헌공파 세장지(월헌 정수강)

 

나주정씨 세장지가 양지면에 있어서 찾아가기로 하고 차를 몰았는데 멀리서도 산 중턱에 아주 근사한 묘역이 보였다. 요즘에 돈깨나 있는 집에서 쓴 묘역으로 생각하고 차를 계속 몰았는데 우연찮게도 그 묘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내용을 확인해본 결과 경기도 고양에서 이곳으로 1988년에 옮겨온 묘역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는 나주정씨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안내판의 내용을 읽고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마침 재실에 관리인께서 상세히 설명을 해주시고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주셔서 고마웠다. 다산 정약용이 나주정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문중의 묘역을 답사하다보면 적극적으로 안내를 해주는 문중이 있는 반면 열쇠로 잠가놓고 연락처도 없이 무책임하게 관리하는 문중도 많다. 이곳에 글을 올리면서 그런 문중에 대해 자주 쓴소리를 하지만 어느 한곳 고쳐지는 곳이 없다. 너는 지껄어라 나는 마이웨이를 가련다... 
문중이나 지역 문화재관리 담당자분들의 고충도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국민들에게 개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야한다.
아무튼 나주정씨와 같은 문중이 있어서 묘지답사하는 사람들이 가끔은 기쁜 마음으로 웃음이 나오기도 하니...  세상은 공평한건가?ㅎㅎ

 

나주정씨(羅州丁氏)
 
본관 연혁
나주(羅州)는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지역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렸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 光州)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성씨의 역사
나주정씨(羅州丁氏)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의 아들 정응도(丁應道)가 신라 헌안왕 때 공을 세워 금성군(錦城君)에 봉해졌다. 그 후 고려 때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을 시조로 하고 있다. 후손들이 금성(나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다만 문헌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분적종 및 분파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크게는 교리공파(校理公派), 월헌공파(月軒公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교리공파에 사직공파(司直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로, 월헌공파에 문화공파(文化公派), 공안공파(恭安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연안부사파(延安府使派), 어사공파(御使公派), 전적공파(典籍公派), 서윤공파(庶尹公派), 야은공파(野隱公派), 사련공파(司鍊公派)로 나뉘어졌다.
주요 세거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효정리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면 산정리
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구로리
충청남도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평안남도 화천군 후탄면 월탄리 

정수강(丁壽崗)
 
1454년(단종 2)∼1527년(중종 2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불붕(不崩), 호는 월헌(月軒). 소격서령(昭格署令) 정급(丁伋)의 아들이다.
1474년(성종 5) 진사시에 합격하고, 147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전교서(典校署)에 소속되었다.
이후 정언‧병조좌랑‧병조정랑을 역임하였으며, 1482년에는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1499년(연산군 5) 장령에 임용되어 성준(成俊)의 불법을 탄핵하기도 하였으나, 논사(論事)를 피하기 위하여 휴가를 얻어 충청도에 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03년 직제학으로 영등포에 파견되어 지방관의 불법행위를 조사한 공으로 부제학이 되었으나, 이듬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재등용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듬해 강원도관찰사로 외보되었다. 이후 판결사‧대사간을 거쳐 1512년 병조참지에 이르렀다.
1516년 사유가당인(師儒可當人)으로 선발되었으며, 1518년 대사성‧대사헌을 거쳐 병조참판‧동지중추부사‧전의제조(典醫提調)‧빙고제조(氷庫提調)를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월헌집》이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

 

문화재지정 경기도문화재 제91호(공안공 정옥형 신도비)
문화재명칭 나주정씨 월헌공파 세장지(월헌 정수강)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제일리 산37-5
관리자(연락처) 나주정씨 월헌공파

 

 

▼ 나주정씨 세장천비..

▼ 나주정씨 월헌공파 세장지에 모셔진 묘...

▼ 나주정씨 중시조 월헌공파 파조 정수강 신도비

▼ 나주정씨 세장지 입구에 세워진 홍살문

▼ 나주정씨 사당 오르는 길..

▼ 나주정씨 사당 추원제

▼ 나주정씨 사당

▼ 나주정씨 사당 추원제 옆 모습... 

▼ 나주정씨 사당 추원제 뒷모습...

▼ 사당 뒷편에 고양에서 옮겨온 구석물이 보존되어 있다. 

▼ 나주정씨 묘역 안내판이 독특하다.

▼ 나주정씨 시조 정윤종 제단

▼ 나주정씨 시조 제단

▼ 나주정씨 시조 제단 후경... 세장지가 높은 곳에 있어서 멀리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 나주정씨 세장지 청룡, 백호 방향 후경

▼ 나주정씨 중시조 월헌 정수강 묘 

▼ 월헌 정수강 묘 석물...최근에 세운 것이다. 비록 최근에 세운 것이지만 정성이 깃들어 있다.  

▼ 월헌 정수강 묘비 전,후면 

▼ 월헌 정수강 묘 측경 

▼ 월헌 정수강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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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