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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점선생 묘

<2012. 7. 20. 좋은터 길라잡이에 올린 글을 다시 티스토리에 옮겨 옵니다.>

 

안산답사 시 신점선생 묘를 항공사진 없이 주소만 보고 찾아갔는데 산을 한바퀴 완전히 돌고서야 찾았다.
스마트폰으로 검색만 했어도 그 위치가 확연히 나오는데 그때는 바로 옆에 있을것만 같아서 산허리를 감고 돌았는데 나중에 찾고보니 정상부근에 북서향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선현묘는 남향위주로 되어있어서 더 혼동이 왔었는지도 모른다. 남향쪽에 있을거라는 생각으로.. 그래서 습관이 무섭다고 하는가보다.
섬처럼 산이 하나 덩그마니 있는데 이 산이 신점선생 묘 때문이란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이래서 좋다. 함부로 산을 허물거나 선현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개인적으로 묘지를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조심스럽게 반대의견을 내본다. 지금 전국적으로 각 지자체가 향토유적 등으로 관리하는 묘지가 어림잡아도 2000개는 넘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자체 240여 곳에서 도지정, 시지정, 군지정 등으로 묘지를 문화재로 지정한 것이 엄청나게 늘었으며, 현재도 계속 묘지가 문화재로 지정되고 있다. 
도시화가 계속되다보니 그나마 문화재로 지정해서 보존하는 절차를 밟는 것은 다행이다 생각하면서도 또 다른 생각을 갖게 되니 이래저래 힘든 것이 정책입안자들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신점(申點)
 
1530년(중종 25)∼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與).
부친은 신정미(申廷美)이며, 모친은 이장배(李長培)의 딸이다. 큰아버지 신순미(申順美)에게 입양되었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문한관(文翰官)을 거쳐, 1569년(선조 2) 정언이 된 이래, 장령‧수찬‧사간‧교리‧부교리‧부응교 등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경연관(經筵官)으로 입시하여 기묘사화 때에 피화된 인물들의 신원(伸寃)에 노력하였다.
1578년 집의가 되어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 국방강화를 건의하는 등 대간으로서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584년 충청도‧경기도 감목관(監牧官)이 되어 마정(馬政)을 순시하고 수령을 규찰하였다.
이때 전라도 전세선(田稅船)이 안흥량(安興梁)에서 파선되는 일이 빈번하여 세곡과 인명손실이 막대함을 알고, 이의 시정을 위하여 항로의 굴찰과 주위에 창고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받았다.
그뒤 의주목사‧강원감사를 거쳐, 1592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연경(燕京)에 체류하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알게 되었다. 이에 병부상서 석성(石星)의 도움을 받아 병부와 예부에 계속 상주(上奏)하여 위급함을 호소하였는데, 그 결과 부총병(副摠兵) 조승훈(祖承訓), 유격장(遊擊將) 사유(史儒) 등에 의한 요동병(遼東兵) 3,000명의 파견이 있게 되었다.
곧 귀환하여 승지‧부호군‧동지중추부사‧병조참의‧호조참의‧형조참판‧형조판서‧지중추부사‧도총관‧동지의금부사 등의 요직을 역임하면서 전란의 타개에 진력하였다.
1597년 강릉부사로 혜정(惠政)을 베풀다가 순검사(巡檢使)가 되어 축성을 담당하였고, 이어서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녹훈되고, 평성부원군(平星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는 평소 성질이 탐비(貪鄙)하여 취렴(聚斂)에 힘썼다는 사신(史臣)의 비평을 받았으나, 예제(禮制)에 밝아 조선 전기 이래 복상시 때 입(笠)에 대한 정해진 제도가 없었는데, 그가 경연에서 백포립(白布笠)을 쓸 것을 건의하여 그뒤 준용되었다고 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안산시 향토유적 제5호
문화재명칭 신점선생 묘
소재지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신길동 산9-2
관리자(연락처) 평산신씨

 

신점선생 묘 
 
조선시대의 문신·서예가, 자는 성여(聖與), 호는 척재(齋), 본관은 평산(平山), 순미(順美)의 아들, 명종 19년(1564) 문과(文科)급제, 예조좌랑(禮曺佐郞) 등을 지내고 상례(喪禮)에 있어서 대상 (大祥)후의 입제(笠制)에 백립(百笠)을 통용하도록 하였다.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구원병을 파견하도록 힘썼다. 귀국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형조,병조,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후 판중추부사 겸 판의금부사(判中樞府事兼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 평성부원군(坪城府院君)에 추증, 시호는 충경(忠景)<안산시청문화관광사이트에서 인용> 

 

신점선생 묘역 입구에 있는 신도비... 이 신도비가 남쪽에 있다보니 혼동이 와서 산을 완전히돌고서야 

정상에서 북서향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 신점선생 신도비

 

 

▼ 신점선생 묘 안내판

▼ 신점선생 묘역

▼ 신점선생 묘 전경 

▼ 신점선생 묘표

 

▼ 신점선생 묘 석물 

▼ 신점선생 묘 문인석 

 

▼ 신점선생 묘 망주석... 백호쪽 망주석은 후대에 새로 새운듯 하다.

 

▼ 신점선생 묘 측경

▼ 신점선생 묘 입수도두... 신점선생 묘는 묘역 뒷쪽에서 접근하게 된다. 

 ▼ 신점선생 묘 후경.. 북서향 묘역은 뒤 즉 현무정이 낮아야지만 묘를 쓸 수 있다. 신점선생 묘는

현무정이 거의 없다싶을 정도로 정상부위에 있는데 그렇다고 돌혈로 쓴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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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