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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重峯) 조헌(趙憲) 묘

 

조헌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참전하여 청주성을 회복하고, 금산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칠백의 군사와 함께 전사한 강인한 선비로 '조헌과 칠백의총'으로 기억하고 있다. 칠백의총은 충남 금산에 있는데 오래전에 다녀와서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기회되면 다시한번 다녀와야 할 듯 하다.

충북 옥천 답사를 진행하면서 조헌선생 묘를 찾았다. 조헌선생은 김포에서 태어나 그곳 집터에 '우저서원'이 세워져 있고, 충북 옥천에 묘소와 사당이 있고, 충남 금산에 칠백의총과 함께 기념관이 있어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묘역 입구에 신도비가 있는데 전자(篆字)는 잘 보이는데 작은 글씨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곳 신도비 있는 곳이 조헌선생 묘역의 수구가 되는데 용호가 잘 막아주고 수구가 꽉 막혀 기운은 좋은 곳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표충사와 영모재가 보이고 그 위쪽으로 언덕을 오르면 선생의 묘가 있다. 이 묘는 초장지인 옥천군 도이리에서 현 위치로 인조 때 옮겨왔다. 묘역은 상당히 높은 곳에 있는데 주산이 하마산으로 멋진 탐랑을 이루고 백호 본신으로 잘 감싸고 있어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횡룡입수인데 꼭 있어야 할 것들이 보이지 않고, 앞쪽 명당이 좁아 재물과 인연이 박할 것으로 보인다.

충의를 몸소 실천하신 조헌 선생의 묘역을 보면서 그때 관군들이 조헌 선생을 도와주었다면 역사는 바뀔 수도 있는데 어째서 하나같이 관군들은 자기의 안위만 생각할까? 그런데 지금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 하기 때문에 뭐라 할 말이 없다. 공직자들의 속성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중봉(重峯) 조헌(趙憲)
 
조헌(趙憲, 1544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유학자이자 경세사상가, 의병장이다. 조선국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시호는 문열(文烈). 본관은 배천(白川). 성혼의 문인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조헌은 5살 때에 글을 읽는 등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효성이 있고 유순했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12세 때부터 김황(金滉)에게 시와 글을 배워 1565년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567년(명종 22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예하 교서관에 속하였다. 이후 평안도 정주(定州) 성균관 향교 교수로 3년간 있으면서 그곳 선비의 풍속을 일신시켰다. 경기도 파주 성균관 향교 교수로 옮겨 성혼을 찾아 가르침을 청하니 성혼은 사양하면서 감히 사제 간의 예로 대하지 않았다.
1572년(선조 5년) 홍문관 정자(正字)로 왕의 불공이 옳지 않음을 말하다가 파면되었다. 1574년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그곳의 문물과 제도의 따를 만한 것을 조목별로 적어 《동환봉사》(東還封事)를 내놓았다. 《동환봉사》에는 명나라의 신분제 실상을 일리며, 조헌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를 본받을 것을 제안하면서, 조선에서도 공·사노비를 양민화해 징병자원을 증대시키면 20년 뒤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후에 박사(博士), 호·예 2조 좌랑, 전적(典籍), 감찰 등을 거쳐 경기도 통진(通津) 현감으로 다스리다가 법을 어긴 궁노비를 취조 중 장살(杖殺)하고 부평에 귀양을 갔다.
1581년에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고, 전라도사로 나가 소를 올려 연산군 때의 공안(貢案)이 아직도 민폐가 되므로 개혁할 것을 청하고 이율곡 등의 선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582년에는 보은 현감으로 소를 올려 노산군(단종)의 후사(後嗣)를 세울 것과 사육신의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할 것을 청했으나 모함을 받아 파면되었다. 1586년 조정에서 학제(學制)를 수정하고 각도 제독(提督)을 창설할 때 공주(公州) 제독이 되어 선비의 규율을 엄하게 하고 앞장서서 실천하니 찾아드는 선비가 많았다. 이때 또 소를 올리는 한편 정여립의 행패를 따지고 공격하였으나 관찰사가 화를 두려워하여 여러 번 물리치므로 벼슬을 내놓고 옥천(沃川)으로 돌아갔다. 1589년에는 대궐에 엎드려 소를 올려 시정(詩政)의 장단점을 철저히 논하였는데 광론(狂論)이라 하여 삼사의 배척을 받고 드디어 길주(吉州)로 귀양 갔으나 그해 겨울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 하여 석방되었다. 이렇듯 조헌은 철저한 유교적 입장에서 많은 개혁안을 상소하고 정론(正論)을 폈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보내와서 명나라를 칠 것을 전달하여 임금과 신하가 머뭇거리고 있을 때 상소를 올려 겐소 등을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상경하여 왜군을 대비할 책을 상소했으나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시골에 내려가 왜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호남의 고경명, 김천일, 영남의 곽재우, 정인홍과 함께, 호서에서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조헌은 보은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였으나 순찰사 윤선각(尹先覺) 등의 시기로 홍성 지방에 옮겨가서 또 의병 천여 명을 모집했다. 이때 왜군은 청주에서 진을 치고 있어 관군이 여러 번 패하였는데, 승장(僧將) 영규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여 충청도 공략의 본거지를 탈환하는 등 전과를 세웠다.
곧이어 의주로 북상하기 전에, 관군의 시기와 방해로 흩어지고 남은 700명의 의병을 이끌게 되었다. 그때 당시 금산(錦山)의 왜군이 충청도 일대로 세력을 넓힐 기세라는 소식을 듣고 그 길로 영규와 함께 금산을 향해 가서 왜군에게 함락된 금산의 10리 밖에 이르렀다. 당초 호남 순찰사 권율과 합세하여 적을 협공할 약속이었으나 권율로부터 그 기일을 미루자는 편지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왜군은 이미 조헌이 거느린 의병의 약점을 알고 역습해 왔다. 그의 군사는 역전 분투하여 왜군에게 많은 손해를 주었으나 많은 수를 대적하지 못하여 조헌과 7백의사가 전멸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호남 방어의 근거지였던 금산을 회복하게 된다.<위키백과>


옥천 조헌 묘소 (沃川 趙憲 墓所) : 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重峰) 조헌(1544∼1592) 선생의 묘소이다.
명종 22년(1567)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는 국가 정책에 있어 바른 말을 서슴치 않았으며, 특히 일본과의 친교정책에 목숨을 걸고 반대하였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선생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에 후율정사를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데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모아 왜적을 공격하는데 앞장 섰으며,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였다. 이어 금산에서 700명의 군사로 수만의 왜적과 싸우다 전원 전사하였다. 그 후 선생의 제자들이 700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곳에 합장하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조헌 선생의 유해는 순절 후 아우 조범(趙範)에 의해 옥천군 안내면 도이리 후율당 근처에 묻혔다가 1636(인조14)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다.<문화재청, 현지 안내문 발췌>

 

문화재지정 묘:충청북도 기념물 제14호, 신도비: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문화재명칭 중봉(重峯) 조헌(趙憲) 신도비 및 묘
소재지 충북 옥천군 안남면 도농리 산 63-1(묘)
관리자(연락처) 배천조씨종중

 

▼ 중봉(重峯) 조헌(趙憲) 신도비와 묘소

▼ 중봉(重峯) 조헌(趙憲) 묘 용맥도... 횡룡인데 귀성도 없고 낙산도 없다. 오히려 골짜기가 보인다. 명당이 협소하여 재물에도 약할듯... 그러나 주산이 멋지고 용호가 잘 감싸주고 있다. 

 

옥천 조헌 신도비 (沃川 趙憲 神道碑)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83호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중봉 조헌(1544∼1592) 선생의 행적을 기리고 있다.

조헌은 명종 20년(1565) 성균관에 입학하여 2년 후인 1567년 병과에 급제하였다. 그후 호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전라도도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옥천군 안읍 밤티로 들어가 제자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1,600여명을 모아 청주성을 수복하였으나 충청도순찰사의 방해로 해산당하여, 불과 700여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하였고 고바야가와의 왜군과 전투를 벌여 끝까지 분전하다가 칠백의병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 비에는 선생의 이 같은 생애와 최후 격전지였던 금산싸움에 대하여 자세히 적고 있다. 인조 27년(1649)에 세운 비로, 좌의정 김상헌이 글을 짓고, 이조판서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문화재청>

 

▼ 중봉(重峯) 조헌(趙憲) 신도비 전경

▼ 중봉(重峯) 조헌(趙憲) 신도비각

▼ 중봉(重峯) 조헌(趙憲) 신도비 안내문과 신도비

▼ 중봉(重峯) 조헌(趙憲) 묘역 입구... 왼편이 표충사이고 우측이 재실이다. 재실 뒤 산에 묘소가 있다.

 

 

옥천 영모재 (沃川 永募齋) :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75호

조선 선조 때의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 조헌(1544~1592)선생의 제사를 위한 건물이다. 원래는 산지기의 기거 용도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건물의 초창기는 알 수 없으나, 상량문으로 보아 1812년 창건하고, 1970년에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5량 민도리 겹처마 팔작 기와지붕의 재실이다. 평면구성은 부엌, 안방, 윗방, 대청, 건넌방으로 되었으며, 방 전면으로는 툇마루를 두었다. 그리고 평면 형태는 중부지역의 '一字形'의 전형적인 유형으로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전면은 사다리꼴의 원형주초, 나머지는 덤벙주초를 놓고 그 위에 방형기둥을 세웠다.
옥천 도농리 영모재는 선조 때의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중봉 조헌의 제사를 위한 건물이다. 이 영모재는 중부지역의 전형적인 민가 형태인 평면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천정은 산속에 입지한 관계로 추운지역에서 나타나는 고미반자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1970년 큰 중수가 있었으나 1812년 축조된 건물이지만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으며, 건축부재, 건축구조, 마루청판, 고미반자, 축조기술 등이 종합적으로 볼 때 보존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문화재청>

 

▼ 조헌(趙憲) 묘소 종합안내, 영모재 안내판

▼ 조헌(趙憲) 묘 재실인 영모재

▼ 조헌(趙憲) 묘 재실인 영모재 전경

▼ 조헌(趙憲) 묘를 내려오면서 바라본 영모재

▼ 조헌(趙憲) 시비... 지당에 비 뿌리고... 2004년9월 문화의 인물로 선정된 기념으로 세웠다.

 

 

옥천 표충사(沃川表忠祠)

표충사는 조헌(趙憲 1544~1592) 선생 순철 후 1608년(선조 41)에 처음 옥천군 이원면 원동리에 세워 이듬해 조정에서 편액을 받은 사당이다. 그러나 여러 번 수해를 입자 1650년(효종 1)에 이원면 이원리 현리 마을에 옮겨 세웠고, 1682년(숙종 8)에 김집을 함께 제사 지내며 조정에서 '창주서원(滄洲書院)'이란 편액을 받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1721년(경종 1)에 권상하 등이 조헌 선생 묘소 아래에 사당을 다시 세우고 표충사라 하였다.
1734년(영조 10)에 왕은 편액을 내려준 뒤 조헌 선생의 아들로 금산에서 함께 순절한 
조완기(趙完基)를 함께 제사 지내게 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 옆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집이다. 안쪽에는 마루를 깔았고, 가운데 칸에 조헌 선생과 아들 조완기의 위패를 모셨다. 사당 바깥으로 돌담장을 돌렸고 삼문을 통해 출입한다.<현장 안내문을 기록함>​

 

▼ 조헌(趙憲) 사당인 표충사와 조헌 영정

▼ 조헌(趙憲) 사당인 표충사 삼문인 충의문

▼ 조헌(趙憲) 사당인 표충사

▼ 조헌(趙憲) 묘에서 바라본 표충사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안내문과 묘 오르는 길에 있는 고목에 자라는 묘목. 조헌 정신 계승이 되길...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오르는 길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측경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원경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전경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비... 좌측 것은 우암 송시열 찬, 우측 것은 1920년 송래희가 쓴 것...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좌우측경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석물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도두... 횡룡인데 능선 너머가 허하다.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후경. 백호가 본신으로 안산을 이루고 우뚝 솟아 있다. 좋은 사격이다.

 

▼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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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