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조선개국공신 심덕부(沈德符) 묘(청송심씨 4세조)

 

선현묘지 답사를 하다보니 이제는 안가본 묘를 가는 것 보다 다녀온 곳을 가는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그만큼 많이 다녔다는 증거다.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학우들과 방학이나 학기 중에 답사를 하는데 반드시 가는 곳이 몇 곳 있다. 연천답사는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다.

연천에는 비무장지대에 미수 허목선생 묘, 진주강씨 강회백선생 묘가 있는데 이 묘를 답사한 후 점심 식사 후에 찾는 곳이 숭의전, 심덕부 묘, 윤호 묘, 정발장군 묘 그리고 시간이 나면 신라 경순왕릉을 보는 것이 거의 정례화 되었다.

이번에는 여름 방학이 아닌 5월중에 연천을 찾았다.

자주 다녀오는 곳이라 어딘가에 답사기를 올렸을 것으로 보고 답사기를 안쓰는데 이번에 한번 확인해 보았더니 2013년에 올린 글이 보인다. 워낙 좋은 묘이고 이번에는 용맥을 밟아 다녀온 곳이라 새롭게 올릴 심산으로 사진을 찾아봤더니 많이 부족하다. 처음 간 곳은 너무 과하다 할 정도로 사진을 찍는데 자주 간곳은 대강 찍다보니 내가 원하는 사진이 누락되어있다. 그래도 있는 사진만으로 새로 답사기를 올린다.

풍수답사로 다니다보니 우리 조상님 묘는 별로 안가는데 남의 문중 묘는 뻔질나게 드나드는 일이 잦은데 특히 청송심씨는 내가 올린 것만 해도 상당하고 이미 다녀온 곳이 많은 문중 중 한 곳이다. 이곳 심덕부 묘는 묘에서 바라보는 안산은 깨지고 망가져 있어서 큰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묘 앞쪽 안산에서 묘를 바라보는 전경이 아주 멋지다. 다음에 가는 답사객들은 묘역을 오르기 전에 앞쪽 논에서 묘역을 바라보면서 명당의 기운을 느껴보시길...

심덕부선생은 조선개국공신으로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회군, 조선개국, 경복궁 건립 등 굵직굵직한 업적을 남기고 특히 최무선과 함께 진포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으며 문관보다는 무장으로 명성을 날렸다. 관직은 좌정승을 역임했다. 아들이 7명인데 그중 다섯째가 세종의 국구(國舅)이신 심온(沈溫)선생이다. 

이곳 묘역은 현무에서 청룡, 백호를 넓게 펼치고 포근하게 감싸는 아늑한 곳에 위치해서 좋은 기운을 얻는 곳이다.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득지(得之), 호는 노당(蘆堂)·허당(虛堂). 아버지는 전리정랑(典理正郎) 심용(沈龍)이다.
고려 충숙왕 복위년 말에 음직(蔭職)으로 사온직장동정(司溫直長同正)에 출사한 이후, 좌우위녹사(左右衛錄事)를 거쳐 1364년(공민왕 13) 수원부(水原府)의 수령이 되었다.
공민왕 말년에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 우왕 즉위 후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우왕 원년에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승직되었다. 이어 밀직부사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와 강계도만호(江界都萬戶)·의주부원수(義州副元帥)·서해도원수(西海道元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378년(우왕 4) 밀직사로 재임하면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서해도원수를 겸하여 여러 차례 왜구 토벌에 공을 세웠다. 특히 1380년 도원수 나세(羅世)와 함께 최무선(崔茂宣)이 제조한 화포를 처음 실전에 사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1385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서 동북면상원수(東北面上元帥)를 겸하여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북청(北靑) 등지에서 동북면에 침투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같은 해 겨울에는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귀국 후에 청성부원군(靑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388년의 요동 출병 때는 서경도원수(西京都元帥)로서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좌군에 속하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도와주었다. 또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세우는 폐가입진(廢假立眞)에는 이성계·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공양왕 즉위 직후에 문하좌시중·경기좌우도·평양도통사(門下左侍中京畿左右道平壤都統使)에 올랐으며, 이듬해 청성군충의백(靑城君忠義伯)에 봉해졌다. 그러나 같은 해 말, 비어(飛語)에 따른 무고로 인해 일시적으로 황해도 토산(兎山)에 유배되었다.
그 뒤 1391년(공양왕 3) 다시 문하좌시중에 복직되고, 하정사인 왕세자 왕석(王奭)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성계·정몽주와 함께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1392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로 조선의 개국을 맞아, 1393년(태조 2) 회군공신(回軍功臣) 1등에 추록되며, 청성백(靑城伯)에 봉해졌다.
1397년 판문하부사, 이듬해에 영삼사사(領三司事)를 거쳐, 72세 때인 1399년(정종 1)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가 이듬해 치사하였다. 심덕부는 고려 말 정치제도의 개혁과 왜구 토벌에 업적을 남겼다. 공양왕 때에 관찰사제를 폐지하고 안렴사제(按廉使制)를 부활시킬 것, 제사(諸司)의 서무를 도당(都堂)에 직접 보고할 것 등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조선 개국 후에는 신왕조 건설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394년에는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가 되어, 한양의 궁실과 종묘를 영건(營建)하는 일을 총괄하여 신도 건설에 큰 구실을 하였다.
한편, 심덕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다섯째 아들인 심온(沈溫)은 세종의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여섯째 아들인 심종(沈淙)은 태조의 부마가 되었다.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거족(巨族)으로 성장하는 기틀이 이로써 이루어졌다. 처음의 시호는 공정(恭靖)이며, 나중에 정안(定安)으로 고쳤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지정 연천군 향토문화제 제29호
문화재명칭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소재지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553
관리자(연락처) 청송심씨대종회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용맥도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원경... 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앞쪽의 논은 물을 저장하는 호수의 개념으로 재물이 넉넉하다 볼 수 있다.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입구.... 과거에는 여기에서 곧바로 묘역으로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때도 빨리 계단을 없애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계단도 없애고 신도비도 아래로 내려서 비각을 세우고... 제각, 제실도 새로 지어서 찾는 답사객들이 맘이 편하다.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비각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홍살문과 사당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에 새로 세운 신도비... 예전에는 좌우에 구 신도비와 신 신도비가 나란히 있었는데 구신도비는 아래로 내려 비각 안에 모셨고 신 신도비는 그자리를 지키고 있다.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부인과 상하장으로 윗쪽이 심덕부 묘, 아래쪽은 계배 인천문씨 묘이다.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석물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근경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입수도두... 도두부터 현무정까지 답사를 진행했다. 조금 오르다가 이날 무릎이 시원찮아서 중간에 내려왔는데... 학우님들은 잘 돌아보고 내려왔다.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후경... 안산이 깨져 있는데... 그나마 개간한 밭에 지금은 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어느정도 자라면 안산이 복원될 것으로 기대된다. 내려오면서 제실에 계신 어르신께 여쭤봤더니 안산 옆 밭은 청송심씨네 밭이 아니고 인근에 있는 분의 밭인데 이곳에 나무를 식재했다고 한다. 나는 청송심씨들이 밭을 개간하고 뒤늦게 깨우쳐서 밭을 다시 복원시키는줄 알았다. 이곳은 안산을 제대로 복원해야 후손들에게 좋은 기운이 미치는 곳이된다.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묘 답사 인증샷... 이날따라 무릎이 시원찮아서 고생했다.

▼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가 그려진 '장수군도'... 심덕부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 그림으로 어느정도 윤곽을 잡을 수 있다. 왼쪽이 심덕부, 중앙이 이성계, 우측이 이지란이다. 이지란 얼굴은 초상화와 유사하다고 하며, 이성계 얼굴은 태조 어진 (국보 제317호)과는 다르다고 한다. 

군산 금산호 시민공원에 세워진 진포대첩 기념탑...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