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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국공신 정도전 제단, 정진, 정인형 묘

 

얼마전 경북 영주에서 정도전 부친이신 정운경선생 묘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정작 정도전의 묘는 아직 답사를 못했는데 예전에 서초구청 뒤산에 전해오는 정도전 묘가 있다고 해서 찾아나선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길을 잘못들어 다른 곳만 보고 온 기억이 난다. 이번에 정도번 묘를 답사하려고 자료를 찾아보니 한양대에서 10여년 전에 그 묘를 발굴작업을 하여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대부 회곽 묘이고, 남자의 묘에는 머리뼈만 나오고 부인으로 추정되는 묘는 사대부가 묘로 밝혀졌다고 해서 아주 궁금해졌다. 다음날 봉화정씨 종친회에 전화를 걸어 답변을 구했는데 평택에 있는 묘에는 예전에 유품만 묻은 제단이라고 연락이 왔다.

봉화정씨종친회장님(정운순님) 말씀을 빌어 옮기면... "한양대에서 발굴조사를 하여 정도전선생 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는데 그 당시 DNA검사는 안하고 탄소연대측정 검사만 했는데 연대가 맞지 않게 나와서 정도전선생이 아니라고 결론이 났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 유골은 어찌 되었냐고 여쭤보니 "문중에서는 받은 일이 없고 아마도 다시 묻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하셨다. 내 생각에는 다시 묻지는 않았을 것 같고 지금도 한양대에서 보관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그렇다면 DNA검사를 하면 아직도 가능성은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요일 평택, 용인을 묶어 정도전선생 묘를 찾아나섰다. 이날이 마침 봉화정씨 문중회의가 있는 날이었는데 괜히 소란 떨것 같아서 조용히 묘역을 답사하고 유적지를 답사했다. 회장님과는 통화를 하여 궁금증을 풀었다.

정도전선생 묘는 삼봉기념관 남측 산 정상부위에 있는데 이곳은 유품을 넣은 제단이다. 묘비에는 배위 경주최씨와 같이 제단으로 표기되어있는데 부인 묘도 아마도 실전된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정도전선생 묘 북쪽 방향 산에는 아들 정진, 증손 정인형 묘가 있어서 함께 답사를 하였다.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정도전(鄭道傳, 1342.10.6 ~ 1398.10.6)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정공미(鄭公美)의 고손자로, 아버지는 형부상서 정운경(鄭云敬)이다. 
정도전은 1342년 경상도 구성 성저마을(현재 대한민국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2동 431번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1347년에서 1348년까지 그 자신의 선향과 본가가 있는 경상북도 영주에서 1년간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시대 형부상서 직위를 지낸 정운경 선생이고, 어머니는 영주 우씨 산원 우연 선생의 딸이다.
고려 시대 시절 과거 급제 후 성균관 등에 있으면서 성리학을 장려하였고, 외교적으로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명나라와의 외교론을 주장하다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으며 1383년 이성계를 만나 정사를 논하다가 역성혁명론자가 되었다. 이후 정몽주, 이성계 등과 함께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1392년 조선 건국을 주도하여 개국공신 1등관에 녹훈되었다. 관직은 판삼사사를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영의정부사에 추증되었으며, '봉화백'(奉化伯)에 봉작되었다.
조선 건국의 일등 공신인 그는 조선의 이념적 바탕을 마련하고 모든 체제를 정비하여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으며, 한양 시내의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한다. 제1차 요동 정벌(1388년 음력 6월)과 제2차 요동 정벌(1392년)에 반대하였으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명나라와 외교 마찰을 빚었고, 공신과 왕자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사병을 혁파하려다가 갈등한다. 그 뒤 요동 정벌을 계획하여 명나라 태조 주원장과 갈등하던 중, 이방원이 정변을 일으킨 뒤 1398년 8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의 군사들에게 피살되었다. 성리학 이념을 보급하였으며, 그는 안향-백이정-이제현의 학통을 계승한 목은 이색의 문하생이자 정몽주, 권근의 동문이다.<위키백과>


희절공(僖節公) 정진(鄭津)
 
본관은 봉화(奉化). 아버지는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이다.
1382년(우왕 8) 낭장이 되고, 사재령(司宰令)·전농령(典農令)을 지냈다.
1391년(공양왕 3) 정몽주(鄭夢周) 등 고려를 지키려는 구세력의 탄핵을 받아 그의 아버지인 정도전과 함께 삭직되었다가, 1392년(태조 1)에 조선이 개국되자 풀려나와 개국공신의 아들로서 연안부사로 등용되었다.
1393년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를 거쳐 경흥부윤·영원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전서와 형조전서를 지냈다. 1398년 중추원부사로 있을 때에 제1차왕자의 난이 일어나 그의 아버지 정도전이 주살되자, 그도 벼슬을 삭직당하여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었다.
1407년(태종 7) 다시 판나주목사로 기용되고, 1416년 인녕부윤(仁寧府尹)이 되어 크게 치적을 올렸다. 1419년(세종 1)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가 1420년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그 해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평안도도관찰사가 되었다. 1423년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424년 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가 되었으며, 1425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 정도전의 후광을 받아 조선 개국 초에는 한때 화려한 직책에 중용되었으나,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몰려 주살되자 일개 수군으로 전락되어 모진 역경을 겪었다. 그러나 성실한 인품이 인정되어 다시 등용되어 재상의 영직(榮職)을 누렸다. 시호는 희절(僖節)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묘
소재지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266(주차:은산리 301-2)
관리자(연락처) 봉화정씨종친회

 

염의(廉義)정운경(鄭云敬)묘(정도전(鄭道傳) 부친) 바로가기

 

정도전(鄭道傳)의 사상(思想)
 
정도전의 개혁사상은 고려말 국가적인 시련과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대책으로서 양인(良人)을 근간으로 하는 국가의 건설과 자주국가의 확립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주례(周禮)를 기본모델로 하여 성리학 사상을 받아들였다. 고려말 사회의 모순은 인간 상호간 증오심의 격화, 즉 윤리의 타락이 원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윤리의 재건이 필요하며, 윤리를 실현하는 수단이 정치이고, 그 전제조건이 경제의 안정이었다. 그는 상하(上下)·존비(尊卑)·귀천(貴賤)의 명분이 바로 서고, 인간마다 자기의 분을 지키면 사회 질서가 확립된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상하질서의 확립을 위한 윤리도덕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이었다. 이를 위한 사상질서로서 성리학만이 유일한 정학(正學)이고 실학(實學)이라는 신념으로 불교가 현실을 부정하는 형이상학적 종교이며 농장주의 공리(功利)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사상체계라고 맹렬히 비난하고, 인류를 금수로 몰아넣는 이단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도덕윤리의 실현과정으로서 정치는 인간을 바르게 하는 것이며, 정치의 주체로 윤리도덕을 체득한 자를 설정했다.
그러한 자격자가 성리학자인 사(士)로서, 진정한 사는 윤리·도덕가일 뿐만 아니라 성리철학자여야 하고 천문·의학·지리·복서(卜筮) 등 기술적인 학문에도 능통해야 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교육자이고 역사가이며,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지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는 고정된 세습신분이 아니라 자질이 뛰어난 자라면 누구나 교육을 받아서 사가 될 수 있으며, 농사를 겸할 수 있는 계층이라고 역설했다. 통치체제로 민의 보호를 위해 지방토호에 의한 자의적인 지배를 배제하고 중앙정부에 의한 전국적 지배를 강화하는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했으며, 그 중심은 군주였다.
군주는 최고의 통치권을 갖고 전국의 토지와 민을 지배하나, 실질적인 통치권은 재상(宰相)이 갖는 재상중심체제를 지향했으며, 통치자의 부정·독재를 막기 위해 감찰권과 언권(言權)의 강화를 중시했다. 통치윤리는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근본이 되어야 하고 형벌은 보조적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민본정치의 실현을 위해서는 외적의 침략을 막아내는 부국강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병농일치를 통한 국방체제의 강화와 중앙군의 증대를 통한 수도치안의 강화를 지향했다.
이러한 체제의 확립은 경제생활의 안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물질적 기초로서 국가재정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농업생산이 진흥되어야 하고, 또한 토지소유관계가 재조정되어야 했다. 고려말 사회적 모순의 가장 큰 원인은 토지소유의 극단적인 불평등에 있으므로 먼저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 삼대(三代)의 공전제(公田制)에 이상을 둔 철저한 전제개혁을 통한 계민수전(計民授田)에 의한 자작농의 창출과 경제적 평등의 실현을 목표로 했다. 또한 민생의 안정을 위하여 부세의 공정과 부담 완화를 강조했다. 부세는 1/10세를 기준으로 법정세율 이상의 수취를 배격하고, 균등한 부세수취를 위하여 호적제도의 정비와 군현제도의 정비, 수령의 엄격한 선발 등을 요구했다. 빈민구제를 위한 정책으로서 의창(義倉) 및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 제도가 도입되어야 하며, 전쟁이나 흉년을 대비하기 위하여 최소한 3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저서로는 앞에 언급된 책들 외에 〈경제의론 經濟議論〉·〈감사요약 監司要約〉·〈팔진36변도보 八陣三十六變圖譜〉·〈오행진출기도 五行陣出奇圖〉·〈강무도 講武圖〉·〈진법 陣法〉·〈진맥도결 診脈圖訣〉·〈태을72국도 太乙七十二局圖〉·〈상명태을제산법 詳明太乙諸算法〉 등이 있으나 전하는 것은 거의 없고, 문집인 〈삼봉집〉에 일부 내용이 남아 있다.<다음백과>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기념관, 사당, 묘가 있는 은산리 입구에 세워져 있는 봉화정씨세거비, 삼봉정도전신도비, 희절공 정진 신도비...

▼ 봉화정씨세거비...

▼ 봉화정씨세거비 아래 세워진 유래비...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신도비...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신도비

▼ 희절공(僖節公) 정진(鄭津) 신도비

▼ 희절공(僖節公) 정진(鄭津) 신도비

▼ 삼봉기념관, 문헌사, 삼봉 묘가 있는 은산리 지도...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시비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제단 전경... 시신이 없이 유품만으로 묘를 만들었다.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묘비... 묘비의 글자가 흐릿하게 되어 잘 안보인다.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묘 후경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사당은 평안 해오름길의 충의길 상에 있다.

▼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묘 사거리 갈림길에서 북쪽으로 20여m 오르면 희절공, 부정공 묘가 나온다.

▼ 이곳 은사리 3.1만세운동을 봉화정씨 후손들이 주도했다. 

▼ 희절공(僖節公) 정진(鄭津) 묘 전경 

▼ 희절공(僖節公) 정진(鄭津) 묘

▼ 희절공(僖節公) 정진(鄭津) 묘표... 오래 되어 글자가 잘 안보이는데... 희절공정진 글자가 또렷하다.

▼ 희절공(僖節公) 정진(鄭津) 묘 석물...

▼ 희절공(僖節公) 정진(鄭津) 묘 후경

 

▼ 부정공(副正公) 정인형(鄭仁炯) 묘 가는 길

▼ 부정공(副正公) 정인형(鄭仁炯) 묘 전경

▼ 부정공(副正公) 정인형(鄭仁炯) 묘

▼ 부정공(副正公) 정인형(鄭仁炯) 묘비

▼ 부정공(副正公) 정인형(鄭仁炯) 묘 측경

▼ 부정공(副正公) 정인형(鄭仁炯) 묘비...

▼ 부정공(副正公) 정인형(鄭仁炯) 묘 석물

▼ 부정공(副正公) 정인형(鄭仁炯)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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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