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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忠壯公) 남이흥 장군 묘(南以興 將軍 墓)

 

당진 답사를 다녀온지가 꽤 지났는데 한동안 글을 못 올렸다. 코로나로 인해 실내 전시실이나 기념관은 모두 문을 닫아서 관람할 수 없었고 묘만 둘러보고 왔다. 이곳 묘역은 원래 경기도 성남에 있었으나 광주대단지 조성 때인 1971년 7월에 현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주변에 장군과 아버지 남유의 위패를 모신 사당(忠壯祠)과 정려, 재실이 있다.
묘소 일원은 2개의 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에는 부실(副室)인 연안 김씨와 후손들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상단에는 왼쪽에 아버지인 남유 장군, 오른쪽에 남이흥 장군의 묘가 있다.
남이흥 장군의 묘는 하동 정씨와 합장묘로 하부에 호석을 설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망주석, 문인석, 장명등을 갖추었다. 묘비는 화려한 반룡(蟠龍)이 새겨진 이수를 가지고 있다. 남유 장군의 묘도 남이흥 장군 묘와 상설이 유사하다. 하지만 묘비에 간결한 형태의 가첨석을 설치한 차이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남응룡(南應龍)이고, 아버지는 목사 남유(南瑜), 어머니는 형조판서 유훈(柳壎)의 딸이다.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아버지가 적탄에 맞아 전사한 데 충격을 받아 글 공부를 포기하고, 활쏘기·말타기에 전념해 1602년 무과에 급제했다.
이어서 선전관을 거쳐 부총관, 포도대장, 충청·경상도병마절도사, 구성부사, 안주목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서도(西道)의 수령직을 자청해 구성부사가 되었다가, 시기하는 자의 무고로 하옥되기 직전 도원수 장만(張晩)의 변호로 무사했으며, 도원수 휘하의 중군(中軍)이 되었다.
이때 장만의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되어 영변에 머무르고 있던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키자 장만의 지휘 아래 중군을 이끌고 많은 무공을 세웠다. 특히 이괄의 부하 유순무(柳舜懋)·이신(李愼)·이윤서(李胤緖)를 회유해 많은 반군을 귀순하게 했다.
서울 근교의 작전 회의에서 장만은 도성을 포위하여 이괄의 군대를 곤경에 빠뜨린 뒤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이흥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길마재[鞍峴]에 진을 치고 위에서 적을 내려다보며 공격하자는 정충신(鄭忠臣)의 주장에 동조해 대승했다.
이 공으로 연안부사가 되었고,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병마절도사로서 영변부사를 겸해 국경 방어의 임무를 맡고 있던 중, 1627년 정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주성에 나가 후금군을 막았다.
이때 후금의 주력 부대 3만여 명이 의주를 돌파하고 능한산성(凌漢山城)을 함락한 뒤 안주성에 이르렀다. 이에 목사 김준(金浚), 우후(虞候) 박명룡(朴命龍), 강계부사 이상안(李尙安) 등을 독려해 용전했다.
그러나 무기가 떨어져 성이 함락되자, 남이흥은 “조정에서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군사를 훈련하고 기를 수 없게 했는데, 강한 적을 대적하게 되었으니 죽는 것은 내 직책이나, 다만 그것이 한이로다.”라고 하며 성에 불을 지르고 뛰어들어 죽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의춘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지정 충청남도 기념물 제52호
문화재명칭 남이흥 장군 묘 일원(南以興 將軍 墓 一圓)
소재지 충청남도 당진시 대호지면 도이리 산120-4번지
관리자(연락처) 의령남씨충장공파대종중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묘 일원

 

남이흥장군일가유품(南以興將軍一家遺品)
 
남이흥장군 일가 유품(南以興將軍 一家 遺品)은 충청남도 당진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유물이다. 1970년 12월 19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21호 남이흥장군유품으로 지정되었다가, 2004년 2월 관계 전문가 추가지정조사 실시 결과에 따라 2004년 9월 25일 남이홍장군일가유품으로 명칭을 변경하면서 고문서 13점, 영정1점, 생활자료 10점, 복식 6점 등 총 30점의 세부유물을 추가 지정하였다.
남이흥(1576∼1627)은 임진왜란 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남유의 아들로, 선조 35년(1602)에 무과에 급제 하고, 이후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1차 지정 유물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었던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 1벌과 인조 임금이 하사하였다고 전하는 곤룡포 1점, 그리고 상아·나무·녹각 등으로 만든 장군과 가족들의 호패 7점이다. 2004년에는 고문서 13점, 영정1점, 생활자료 10점, 복식 6점 등 총 30점의 유물을 추가로 지정하였다. 이 외에도 고서(古書), 서한(書翰), 영정, 교지 등 500여 점의 유품들은 17세기 초의 생활상과 복식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위키백과>

 

▼ 남이흥(南以興)장군 일가 유품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유품들이 보관 된 모충관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유품들이 보관 된 모충관2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안내문

▼ 충장사, 남씨양세충신정려 안내문

▼ 남씨양세충신정려

▼ 충장사(忠壯祠)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묘역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부실 연안김씨 묘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묘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묘표

▼ 충장공(忠壯公) 남이흥(南以興)장군 석물

 

▼ 남이흥(南以興)장군 부친 나주목사 남유(南瑜) 묘

▼ 남이흥(南以興)장군 부친 나주목사 남유(南瑜) 묘표

▼ 남이흥(南以興)장군 부친 나주목사 남유(南瑜) 묘 석물

▼ 남이흥(南以興)장군 부친 나주목사 남유(南瑜) 묘 측경

▼ 남이흥(南以興)장군과  부친 나주목사 남유(南瑜) 묘의 입수도두

▼ 남이흥(南以興)장군과  부친 나주목사 남유(南瑜) 묘 후경

 

▼ 남이흥(南以興)장군 후손 묘

 

▼ 활쏘기 국궁장 충장정

 

▼ 남이흥(南以興)장군과  부친 나주목사 남유(南瑜)의 사적

▼ 남이흥(南以興)장군 신도비와  의천부원군 남유(南瑜)의 노량전적유허비

▼ 남이흥(南以興)장군의 조부이자 의천부원군 남유(南瑜)의 부친인 이요당 남응룡의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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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