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

 

무수골은 오래전부터 학우님들과 묘지답사를 하곤 했는데 근자에 코로나로 인해 다녀오지 못한 곳이다. 이번에 스승님과 무수골에 다녀올 일이 생겨서 오랜만에 다녀왔다. 무수골에 터를 잡은 집안은 전주이씨 영해군파 후손들이다. 이곳에 영해군 묘와 그의 아들 영춘군, 완춘군 묘가 있고 손자, 증손의 묘가 있다.
이곳 영해군파 묘역에 올 때 마다 날씨가 비가오거나 눈이 왔었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아주 좋아서 사진 찍기에 제격이었다. 그런데 내가 착각한게 영해군 묘는 이미 여러번 블로그에 올린줄 알고 사진을 별로 안찍은 것인데 막상 와서 보니 영해군 묘역을 올린 포스팅이 장마철에 빗방울이 튄 사진만 올라가 있어서 사진이 별로 없지만 있는 것으로 다시 올리게 되었다.
영해군 묘역은 장인인 평산신씨 신윤동 묘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처가집 산소에 뭍힌 것이 아닌가 생각드는데 조선왕조실록 내용을 읽어보면 계유정난 때 세조로부터 하사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영해군 묘역은 입수에 부스럼 같은 바위돌이 널부러져 있고, 용이 멈추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내려가는 곳에 있어서 혈로 보기 어렵다. 이런 곳에서는 후손들도 재물이 빈약하기 마련인데... 10여년 전에는 묘역 관리도 제대로 안하는듯 보였는데 근자에 홍살문도 새로 세우고 묘역도 깔끔하게 잘 관리하고 있어서 유심히 살펴보니 묘역 입구에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그 옆에는 논에 물을 담아 양식을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이는 재물과 깊은 연관을 갖기 때문에 후손들이 조금 펴지 않았을까 유추해 본다.
영해군 묘 청룡자락 끝에는 차남 길안도정 이의 묘가 있고, 백호자락 끝에는 장남 영춘군 이인 묘가 있다. 장남 영춘군 묘는 입수룡도 활발하고 용이 멈추고 기운을 응축했기 때문에 혈이 맺혔다고 보여진다.
차남 길안도정 묘는 전순 앞이 꺼져 평평해서 자세히 보니 예전에 묘가 있는 파묘터로 보여진다. 좋은 기운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곳이다. 그외 완천군 이희 묘는 과룡지에 있는데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해볼 생각이다.
영해군묘역 입구에 충노김동 묘역이 있어서 자료를 확인해 보니 그 옆에 있는 강녕군 이기의 노비였는데 연산군 때 내폐사건으로 이기가 무고로 위기에 몰리자 충노 김동이 자기혼자 한 것이라고 끝내 주장하고 주인을 살려 영해군파 묘역에 뭍히고 묘표까지 세워지게 되었다.
영해군파 묘역은 영춘군 이인 묘가 비교적 좋은 기운을 얻고 있고 앞쪽에 연못이 후손들에게 재물을 안겨주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앞으로도 그 연못은 잘 관리를 해야하고 양식장으로 쓰이는 논도 계속해서 물을 저장해 놓아야 효과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寧海君派墓域)은 크게 동쪽 능선과 서쪽 능선의 두 구역으로 나눌 수 있다. 서쪽 능선에는 가장 상단에 영해군의 장남인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1465~1507]의 묘와 신도비가 있고, 그 아래로는 부원정(富原正) 이이(李㶊)와 유인(孺人) 전주 유씨(全州柳氏)의 묘가 있다.
동쪽 능선에는 가장 상단에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1436~1478]의 묘가 있고, 이 무덤 왼쪽 뒤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영춘군의 장남인 완천군(完川君) 이희(李禧), 완천군의 셋째 아들인 평성수(平城守) 이질(李耋)의 묘가 있다. 그리고 영해군 이당 묘 아래에는 증 좌찬성(贈左贊成) 신윤동(申允童), 영해군의 배위인 임천 군부인(林川郡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 영춘군의 아들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 충노(忠奴) 김동(金同) 묘가 차례로 있고, 이 능선 동쪽으로 길안 도정(吉安都正) 이의(李義)의 묘가 분포하여 있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은 영해군파의 파조인 영해군 이당 묘가 세워진 15세기 말엽부터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영해군의 아들인 영춘군 이인이 중종반정 이후 원종공신이 되면서 묘역이 크게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영해군 이당의 직계 자손을 중심으로 16세기 이후까지 묘역을 확장하였다.
파조인 영해군 이당 묘는 단분 단독장이고, 좌향은 동남향이다. 묘역에는 묘표, 석상, 문석인, 장명등 등을 배치하였다. 영해군 이당의 묘표는 개석이 하엽형인 15세기의 전형적인 묘표로 비신 앞면 가운데에 ‘영해군 시 안도공 당지묘(寧海君諡安悼公瑭之墓)’라고 썼다.
영해군 이당의 아들인 영춘군 이인 묘는 쌍분 합장묘이고, 좌향은 동남향이다. 묘역은 산중턱에 넓게 조성되어 있는데, 상계에는 두 봉분 사이에 묘표를 1기만 세웠고, 봉분에는 뒤가 예각인 오각형의 호석(護石)을 둘렀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 중에서 주목할 만한 금석문은 이인 신도비이다. 신도비의 전액은 ‘목성공 신도비명(穆成公神道碑銘)’이며, 비제는 ‘유명 조선국 숭헌대부 영춘군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崇憲大夫永春君神道碑銘幷書)’이며, 앞면 끝 부분에 ‘정덕 사 년 구월 일 립(正德四年九月日立)’이라고 제작 연대가 쓰여 있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은 세종의 아들인 왕친의 묘소이다. 따라서 조선 전기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집중하여 나타나고 있는 왕친 묘역의 현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 지역의 또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1509년 건립된 이인 신도비 비문 중에 ‘도봉(道峯)’ 및 ‘노원(蘆原)’ 등의 현재 지명이 보이고 있어 이 지역 지명을 최초로 언급한 기록으로 추정되어 가치가 매우 높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영해군 이당(寧海君 李瑭)
 
[1435년(세종 17)~1477년(성종 8) = 43세]. 조선 전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왕자. 세종(世宗)의 서출 10남 2녀 중에서 제 9왕자. 봉작(封爵)은 영해군(寧海君)이다. 초명(初名)은 이장(李璋)이었는데, 뒤에 이당(李瑭)으로 고쳤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 신빈김씨(愼嬪金氏)는 청풍 김씨(淸風金氏)로서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김원(金元)의 딸이다. 신빈김씨(愼嬪金氏)가 낳은 아들 6명 중에서 다섯째인데, 동복형은 계양군(桂陽君)이증(李璔), 의창군(義昌君)이공(李玒), 밀성군(密城君)이침(李琛), 익현군(翼峴君)이관(李璭)이고, 동복아우는 담양군(潭陽君)이거(李璖)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자, 종친(宗親)들과 왕자들은 수양대군에 대한 지지와 반대로 갈리었다. 영해군 이당은 그의 동복형제들을 따라서 수양대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영해군은 계유정난 이후에 세조가 베푼 연회에 참석하였고, 1454년(단종 2) 7월 세조가 녹양평(綠楊坪)에서 군사를 훈련할 때에도 따라 갔다. 세조는 단종을 보호하거나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벌받은 이들의 가산을 적몰하고 이를 종친과 공신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영해군도 그 전토를 하사 받았다.
1477년(성종 8) 5월 5일 졸하였는데, 향년이 43세였다. 안도(安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1872년(고종 8) 영종정경(令宗正卿)에 추증되었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신윤동(申允童)의 딸이고, 신효창(申孝昌)의 손녀이다.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장남은 영춘군(永春君)이인(李仁)이고 차남은 길안정(吉安正) 이의(李義)이다. 1녀는 박승약(朴承爚)의 처가 되었다.<위키실록사전>

 

문화재지정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06호
문화재명칭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1
관리자(연락처) 전주이씨 영해군파 종중

 

▼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이 있는 무수골의 유래비

▼ 무수골에는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과 개성이씨 이등(배위 태조 서녀 의령옹주) 묘가 있다.

▼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 묘소 위치도

▼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 입구에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 정려문(홍살문) 복원기념비 내용을 보니... 가문의 충의로운 일(충노 김동에게 내려진 정려문)로 정려문이 세워졌는데 이를 복원했다고 안내되어 있다.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 안내문

▼ 전주이씨 영해군파 묘역(全州李氏 寧海君派 墓域)... 맨 위쪽에 영해군 묘가 있고 그 아래에 영해군 장인인 증 좌찬성(贈左贊成) 신윤동(申允童) 묘가 있고, 그 아래에는 영해군 배위 임천 군부인(林川郡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 묘가 있다. 맨 아래에 영춘군 차남 이기와 충노 묘가 있다.

▼ 영해군 묘(寧海君 墓) 전경

▼ 영해군 (寧海君) 묘표와 배위 평산신씨 묘표

▼ 영해군 (寧海君) 묘 석물...

▼ 영해군 (寧海君) 묘 입수도두... 바위가 깊게 박히지 못하고 부스럼처럼 붙어있다.

▼ 영해군 (寧海君) 묘 후경... 이기법으로 8층 천반봉침 건좌손향 을진파 자생향으로 매김되어 있다.

▼ 영해군 (寧海君) 배위 임천군부인(林川郡夫人) 평산 신씨(平山申氏) 묘

▼ 영해군 (寧海君) 장인 증 좌찬성(贈左贊成) 신윤동(申允童) 묘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1465~1507]은 세종의 아홉째 아들[신빈 김씨(愼嬪金氏) 소생]인 영해군(寧海君) 이당(李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윤동(申允童)의 딸이다. 자는 자정(子靜)으로 10세 때인 1474년(성종 5) 영춘군에 봉해지고, 이후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올랐다. 사옹원 제조(司饔院提調)를 지냈는데, 1506년(연산군 12) 아들 완천부정 이기(李祺)의 내폐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형제가 모두 남해 섬으로 귀향 갔다.
1507년(중종 2) 중종반정으로 유배가 풀리고, 정국 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이 되었으며 관작이 회복되었다. 부인은 증 영의정 유양(柳壤)[영의정 유순정의 아버지]의 딸인 광양현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1507년 43세로 생을 마쳤으며,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영춘군 이인 묘는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고, 좌향은 동남향이다. 묘역은 산중턱에 넓게 조성되어 있는데, 상계에는 두 봉분 사이에 1기의 묘표를 세웠고, 봉분에는 뒤가 예각인 오각형의 호석(護石)을 둘렀다. 하계에는 석상, 동자석인, 장명등, 망주석, 신도비를 배치하였다. 묘표는 관석과 비신이 한 돌로 이루어졌으며, 비신은 마모가 심하여 판독이 어렵다.
이인 신도비는 이수 방부형으로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1509년(중종 4)에 세운 것으로, 당시 영의정이던 남곤(南袞)이 비문을 짓고, 당대 최고의 명필가인 김희수(金希壽)가 글씨를 썼다.
이인 신도비의 전액은 ‘목성공 신도비명(穆成公神道碑銘)’이며, 비제는 ‘유명 조선국 숭헌대부 영춘군 신도비명 병서(有明朝鮮國崇憲大夫永春君神道碑銘幷書)’이다.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내에 위치하여 후손들에 의해 잘 관리되고 있다. 서울 지역 조선 전기 묘역으로는 드물게 묘역과 석물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므로, 향후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1997년 12월 31일 영춘군 이인 묘가 위치한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이 서울특별시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영해군 (寧海君) 묘 백호자락에는 장남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가 있다. 영춘군 묘 전경

▼ 영해군 (寧海君) 장남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 배위는 영의정 유순정의 누이다.

▼ 영해군 (寧海君) 장남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 석물

▼ 영해군 (寧海君) 장남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신도비

▼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신도비는 남곤이 찬하고 당대 명필 김희수가 썼다.

▼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표와 장명등

▼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 석물...

▼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 장명등과 신도비

▼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 후경... 묘역에 오각형 둘레석을 썼다. 앞쪽으로 조안산이 무척 평화롭다.

▼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 입수룡을 밟고 다녀왔다. 용이 활기차게 내려온다.

▼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묘 동영상

 

 

▼ 영해군 (寧海君) 묘 청룡자락 끝에 있는 영해군 차남 길안도정(吉安都正) 이의(李義) 묘 전경

 

▼ 영해군 (寧海君) 묘 위쪽으로 입수룡을 따라 오르면 과룡처에 영해군 손자(영춘군 장남) 완천군 이희 묘가 있다.

▼ 영춘군의 장남인 완천군(完川君) 이희(李禧) 묘... 부인은 두 명이 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성준(成俊)의 손녀이고 두 번째 부인은 반남박씨이다. 묘표의 비신 앞면에는 ‘중의대부 완천군 희 묘 현부인 창녕 성씨 현부인 반남 박씨 부좌(中義大夫完川君禧墓縣夫人昌寧成氏縣夫人潘南朴氏祔左)’라 새겨져 있다.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와 충노 김동(忠奴 金同)
 
이기(李祺)는 조선 세종의 9남 영해군(寧海君) 이당(李塘)의 장남인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의 차남이다. 부인은 양주 조씨(楊州趙氏)로 조방우(趙邦佑)의 딸이다. 후처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이다.
이기는 연산군 대와 중종 대에 걸쳐 주로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연산군 대에 나주 기생 출신의 나인 김숙화(金淑華)가 이기의 집을 빼앗으려 하였는데, 당시 강녕 부정(江寧副正)으로 있었던 이기가 이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이기의 집 노비 금동(金同)[일명 금음동(今音同)]과 함께 거친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에 김숙화가 연산군에게 무고하니 연산군이 크게 노하여 이기의 부모·처자·형제·장인을 모두 연좌하여 가두어 국문하도록 명하는 한편, 집을 봉하고 노비를 모두 잡아오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추관(推官)들에게 낙형(烙刑)을 쓰도록 닦달하는 한편, 이기 형제의 죄를 정하여 유배지를 정하도록 재촉하였다. 그리고 이기와 그 아버지, 형제의 고신(告身)을 모두 빼앗았으며, 이기에게 장(杖) 100을, 그 아버지에게 장 80을 때려 유배지에 보내고, 이기는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명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이기의 가문은 복권되었다. 정조 대에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이기만이 시호를 받지 못했으니 시호를 내리자는 상소가 올라왔고, 정조가 이에 응하여 1794년(정조 18) 9월 7일에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특히 위의 사건(내폐사건)에서 죽는 순간까지 주인 이기를 대신하여 모두 자신의 죄라 하였던 노비 김동은 충노(忠奴)로 지정되어 1508년(중종 3) 4월 5일에 의노(義奴) 김동을 표창하는 문려(門閭)를 동네 어귀에 세우고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다. 3년 후에 다시 명을 내려서 집 앞에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김동의 묘는 도봉구 도봉동 일원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내에 주인이었던 강녕군(江寧君) 이기의 묘와 함께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묘 앞에는 1면으로 된 묘비가 있는데 ‘고 충노 김동(故忠奴金同)’이라고 새겨져 있다. 조선 시대 노비의 묘로서 묘비까지 갖추고 있는 극히 드문 예이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위키백과 발췌>

▼ 영춘군의 차남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 묘

▼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 묘 옆에 나란히 묻힌 충노 김동(忠奴 金同) 묘

▼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 묘와 충노 김동(忠奴 金同) 묘

▼ 강녕군(江寧君) 이기(李祺) 묘표와 충노 김동(忠奴 金同) 묘표

정보가 유익했나요? 도움이 되었다면 공감, 댓글, 광고 등에 터치 한번 부탁해요...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