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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胡安公 李登과 義寧翁主 墓域)

 

의령옹주 묘는 한 10여년 전에 이곳을 답사하면서 가보려고 시도 했었는데 당시에 문중 후손이 사유지라고 절대 들어가서는 안된다 해서 정상적으로는 안될 것 같아서 편법으로 영춘군 묘역에서 옆으로 둘러 가보았는데 너무 험해서 포기하고, 한번은 자현암에서 진입을 시도해 봤지만 그곳도 험하기는 매한가지라서 포기했었다. 그 뒤에 영해군 묘역을 들를 때 마다 가보았으나 입구에 큰 개들이 지키고 있어서 포기한 채로 지내왔다.

이번에 스승님과 함께 무수골 답사를 하면서 혹시나 싶어 차를 몰고 들어갔는데 주인장이 안계셔서 인사도 못드렸지만 일단 현장 답사를 할 수는 있었다. 혹시 답사 중에 오시면 그때 사정 얘기하기로 하고 진행했다.

묘역 입구에는 개성이씨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사적비 옆에는 이등 묘표와 의령옹주 묘표를 새로 만들어서 세워 놓았는데 묘역에 세우지 않고 입구에 세워놓았다. 이유가 궁금했었는데 먼저 다녀온 분들의 답사기를 보니... 과거에 묘역에 새로 만든 묘표를 세웠는데... 후에 아마도 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묘역의 원상회복을 요구한듯 보인다. 그래서 의령옹주 묘에 둘렀던 둘레석도 치워져 있다. 후에 세운 묘표는 어찌할 수가 없어서인지 입구 선조사적비 옆에 나란히 세워놓은 것이다.

묘역은 상하장으로 되어 있는데 위쪽 봉분이 부군 이등, 아래쪽이 의령옹주 묘다. 이등 묘는 우이암에서 내려오는 맥이 마지막 산진처에서 비룡입수를 하며 치올라 자리를 만들었다. 입수도두에는 사각형의 제단 비슷한 시설이 되어있는데 왜 하필 입수도두에 그걸 세웠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등 묘와 옹주 묘는 사각봉분으로 되어 있어서 조선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묘역의 정혈처는 부군 이등 묘가 되고 옹주 묘는 전순에 쓴 것이다. 이등 묘역은 잘짜여진 국세에 수구가 잘 막혀있어서 좋은 조건이 갖춰져 있다. 다만 안산이 비스듬하게 되어있어서 그것은 흠으로 작용한다.

 

의령 옹주(義寧翁主)
 
본관은 전주(全州). 생몰년은 미상이다. 태조의 서녀로 어머니는 찬덕 주씨(贊德周氏)이다. 배우자는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된 이덕시(李德時)[이개(李開)로 개명]의 아들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이다. 이등과의 사이에서 4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이황(李宺)·이선(李宣)·이삼(李穼)·이효(李宯)이며, 딸들은 각각 진양 정씨 정소(鄭韶), 청도 김씨 군수(郡守) 김맹형(金孟衡), 신평 이씨 직장(直長) 이만생(李晩生)에게 시집갔다.
의령 옹주(義寧翁主)는 비록 천출이기는 하나 태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등의 아버지 이개가 개국공신이기도 하였으므로 의령 옹주 부부는 태조와 왕실로부터 아낌과 보호를 받았다. 1400년(정종 2) 이등이 장군에 임명되자 그가 내료(內僚) 출신이라 하여 당시 장군방(將軍房)의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회좌례(會座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회좌례를 통해 적임 여부를 판단해야 새로 제수한 자들이 직무를 행할 수 있었기에, 이는 이등을 적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태조가 이를 듣고 노하자 정종이 장군방을 혁파하였다.
1419년(세종 1) 전 지평주사(知平州事) 평득방(平得邦)은 딸을 이등의 아들 이선과 혼인시키기로 약속한 후 이등이 가난하다 하여 사절하였는데, 세종은 이때 ‘이등의 아들 이선은 태조께서 사랑하시던 외손이요, 그 어미가 비록 천생이나 나의 누이이니, 나 역시 사랑하는 처지’라 하여 의령 옹주와 그 가족을 아끼는 뜻을 명확히 드러내면서 평득방을 하옥시키기도 하였다.
무수골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1978년 건립된 ‘개성 이씨 선조 사적비(開城李氏先祖事蹟碑)’가 있는데, 이 사적비 뒤로 올라가면 계천위 이등의 묘역이 나온다. 묘역에는 상측과 하측에 두 기의 무덤이 있는데, 위의 것이 이등의 묘이고, 아래가 의령 옹주의 묘이다. 의령 옹주의 묘는 묘표·상석·문인석 등의 옛 석물과 근래 세워진 향로석을 갖추고 있다. 봉분에는 근래에 원형의 호석을 둘렀다. 묘표는 1면비로 전면에 ‘의령 옹주지묘(義寧翁主之墓)’라 새겨져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호안공(胡安公) 이등(李登)
 
본관은 개성(開城). 개성 이씨의 시조는 고려 충숙왕 대의 이차감(李次瑊)으로, 청주 이씨로부터 분적하여 개성에 정착하였다. 이차감의 손자이자 이등의 아버지인 이덕시(李德時)[이개(李開)로 개명]는 고려조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된 바 있다. 따라서 후손들이 이개를 일세조로 하고 개성을 본관으로 삼았다.
이등(李登)은 태조의 서녀(庶女)인 의령 옹주(宜寧翁主)와 혼인하였다. 의령 옹주는 태조의 총희인 찬덕 주씨(贊德周氏) 소생으로 비록 천출이기는 하나 태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등의 아버지 이개가 개국공신이기도 하였으므로 이등 또한 태조와 왕실로부터 아낌을 받았다. 1400년(정종 2) 이등이 장군에 임명되자 그가 내료(內僚)[궁중에서 잡무를 처리하는 벼슬아치] 출신이라 하여 당시 장군방(將軍房)의 방주(房主) 박동미(朴東美)와 장무(掌務) 김성미(金成美)가 회좌례(會座禮)를 행하지 아니하였다. 당시 회좌례를 통해 적임 여부를 판단해야 새로 제수된 자들이 직무를 행할 수 있었기에, 이는 이등을 적임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과 다름없었다. 태조가 이를 듣고 노하자 정종이 장군방을 혁파하였다.
또한 1405년(태종 5)에는 이덕시가 양인을 억압하여 천인으로 만들었다 하여 강화도에 귀양 보낸 일이 있었다. 이등이 판결을 잘못한 것이라 하여 신문고를 쳤다가 사헌부에게서 탄핵을 받았는데, 태종은 이를 듣지 않고 이등을 용서하였다. 1419년(세종 1) 전 지평주사(知平州事) 평득방(平得邦)은 딸을 이등의 아들 이선(李宣)과 혼인시키기로 약속한 후 이등이 가난하다 하여 사절하였다가, 세종의 명으로 하옥당하기도 하였다.
1422년 개성군(開城君)에 봉해졌으며, 1435년 계천군(啓川君)에 봉해졌다. 1450년(문종 즉위년) 종실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 부마를 위(尉)라 개칭하기로 하였으므로 계천위(啓川尉)가 되었다. 1439년에는 넷째 아들 이효(李宯)가 계집종과 사통한 일로 파직당하였다. 1457년(세조 3)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이 착하고 부지런하여 만년에도 항상 조알(朝謁)의 예를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의령 옹주와의 사이에 4남 3녀를 두었다.
무수골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1978년 건립된 ‘개성 이씨 선조 사적비(開城李氏先祖事蹟碑)’가 있는데, 이 사적비 뒤로 올라가면 계천위 이등의 묘역이 나온다. 묘역에는 상측과 하측에 두 기의 무덤이 있는데, 위의 것이 이등의 묘이고, 아래가 의령 옹주의 묘이다. 이등의 묘는 묘비·상석·문인석 등의 옛 석물과 근래 세워진 향로석을 갖추고 있다. 봉분에는 장방형의 석재로 네모꼴의 호석을 둘러 여말 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묘비에는 ‘계천위 시 호안공 이등지묘(啓川尉諡胡安公李登之墓)’라 새겨져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문화재지정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34호
문화재명칭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胡安公 李登과 義寧翁主 墓域)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5번지
관리자(연락처) 개성이씨 종중

 

 

개성이씨(開城李氏)
 
개성이씨(開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차감(李次域)은 고려(高麗) 충숙왕(忠肅王) 때 녹사(綠事) · 영동정 (令同正) 등을 역임하고, 개성 부윤(開城府尹)을 지냈으며 누대(累代)에 걸쳐 개성(開城)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여 왔다. 그 후 덕시(德時)가 고려에서 벼슬이 통의대부(通義大夫)에 이르렀고, 조선(朝鮮) 개국(開國)에 공(功)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動)되어 자헌대부 (資憲大夫)로 호조(戶曹) 판서(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므로 후손들은 덕시(德時)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개성 (開城)을 본관)으로 삼아 청주 이씨 (淸HI李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개성(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地 名)으로, 고려(高麗)의 수도(首都)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 · 송도'(松都) · 개경 (開京) · 부소갑 . 동비홀(冬比忽) · 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었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 (開城)과 송악(松 岳)을 합쳐 개주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었고. 1949년 시제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덕시(德時)의 아들 동(登)이 계천위(啓川尉)에 봉해졌고 1422년(세종 4) 개성군(開城郡)에 개봉(改封)되었다. 또한 세종(世宗) 때 과거에 오른 선(宣)은 덕시의 손자로 판서(判書)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광세(匡世)는 세종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현령(縣令)을 지냈다.
그 외 화가로 이름난 명기(命基)는 사과(司果)를 역임한 종수(宗秀)의 아들로 특히 초상화에 뛰 어나 1796년(정조 20) 왕의 초상화를 그려 더욱 유명해 졌으며, 환후(JI堅)는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이씨(開城李氏)는 전국에 4,2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성씨뉴스닷컴>

 

▼ 개성이씨(開城李氏) 선조사적비

▼ 새로 만든 이등 묘표와 의령옹주 묘표[이등묘표:계천위 증시 호안공 이등지묘(啓川尉贈諡胡安公李登之墓), 의령옹주 묘표: 의령옹주지묘(義寧翁主之墓)]... 묘역에 구 묘표와 나란히 세웠다가 다시 묘역에서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胡安公 李登과 義寧翁主 墓域) 입구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胡安公 李登과 義寧翁主 墓域) 안내문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胡安公 李登과 義寧翁主 墓域)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胡安公 李登과 義寧翁主 墓域) 용맥도

▼ 호안공 이등과 의령옹주 묘역(胡安公 李登과 義寧翁主 墓域)... 앞쪽이 의령옹주, 뒤쪽이 이등 묘

예전 묘를 보니 새로 만든 묘표를 세웠다가 다시 원위치 시킨 것을 알 수 있고, 의령옹주 묘에 둘렀던 둘레석도 원위치 시킨 듯 보인다.

▼ 의령옹주 묘(義寧翁主 墓)

▼ 의령옹주 묘(義寧翁主 墓) 문인석

▼ 의령옹주 묘(義寧翁主 墓) 후경

 

▼ 호안공 이등 묘(胡安公 李登 墓)

▼ 호안공 이등 묘표(胡安公 李登 墓表)

▼ 호안공 이등 묘(胡安公 李登 墓) 문인석

▼ 호안공 이등 묘(胡安公 李登 墓) 입수룡은 비룡입수인데 입수이절이 거의 90도로 꺾어서 들어온다. 입수도두에 제단 같은 시설을 한 것은 처음 본다.

▼ 호안공 이등 묘(胡安公 李登 墓) 후경... 안산이 가지런하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것은 좋지 못하다.

 

▼ 호안공 이등 묘(胡安公 李登 墓)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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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