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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

 

<현장답사나 간산을 다녀온 곳은 많은데 답사기를 올리기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사진 정리도 제대로 되지않아 일차적으로 답사기 올리기 전까지 사진을 보관하고 관리할 목적으로 사진만 보관하려고 만든 자료실입니다. 정식으로 글을 올리기 전까지만 유지하는 곳입니다. 이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동 인씨(喬桐 印氏)
 
교동(喬桐)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 고구려의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서 해중(海中)의 섬이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교동현으로 개명하여 해구군(海口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도 계속하여 교동현이라 하였고, 1629년(인조 7년)에 부(府)로 승격되었으며 수사(水使)가 부윤(府尹)을 겸임하였다. 1895년(고종 32년)에 강등(降等)되어 강화군(江華郡)에 예속되었으며,1914년 군을 폐하고 강화(江華)로 합(合)했다.
교동인씨(喬桐印氏)는 중국 계통으로「좌씨전(左氏傳)」과 「계고집성(稽古集成)」에 의하면 중국 정(鄭)나라 목(穆)의 증손 7명 중에 자장(子張)의 아들 단(段)이란 사람이 조부의 이름인「자인(子印)」의「인(印)」자(字)를 따서 성(姓)을 인씨(印氏)로 삼았다고 한다. 단(段)의 후손인 인 서(印 瑞)가 진(晋)나라 풍익(馮翊)의 대부(大夫)로서 297년(신라 유례왕 4)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한 것이 우리나라 인씨(印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그 후 33세손 빈이 고려 인종(仁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로 교수(喬樹)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교동(喬桐)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文獻)에 나타난 인씨(印氏)의 본관(本貫)은 23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 고려 충령왕의 비)를 배종(陪從)하고 들어와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지낸 원(元)나라 사람 후(候)를 시조(始祖)로 하는 「연안인씨(延安印氏)」와 「교동인씨(喬桐印氏)」를 제외한 나머지는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한 것으로 전한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빈의 아들 완(完)이 고려 때 문과에 올라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올랐으며 손자 규(珪)가 판이부상서(判吏部尙書)를, 증손(曾孫) 현원(玄元)이 응양위 대장군(應揚衛 大將軍)을 거쳐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그리고 현손(玄孫) 정(貞)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빈의 9세손 당은 공민왕(恭愍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 兵馬使)로서 압록강(鴨綠江) 서쪽의 파사부를 격퇴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으며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또한 그의 아들 안(安)이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해(海)가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지냈고, 손자 원보(原寶)가 서북면 체찰사(西北面 體察使), 중보(重寶)가 상장군(上將軍)을 각각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저(著)와 절충장군(折衝將軍) 철관(鐵寬), 선략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정난원종이등공신(靖難原從二等功臣)에 오른 발(潑),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 이헌(以憲), 그리고 참판(參判)을 역임한 명조(明朝)·근영(瑾永)·석신(錫信)·상혁(相赫) 등이 가문을 빛내었다.<교동인씨대종회>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 인당(印璫)
 
인당(印璫, ? ~ 1356년 8월 26일(음력 7월 30일)[1])은 고려의 무신, 장군, 정치인이다. 본관은 교동(喬桐)이다. 첨의평리(僉議評理),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역임하였다.
서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양광도 교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335년 음서로써 천거되어 그 후 1343년(고려 충혜왕 복위 4년)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前 대언(代言) 인당(印璫)이 왕의 폐신(嬖臣)인 임신(林信)ㆍ박양연(朴良衍)ㆍ임이도(林以道)ㆍ남궁신(南宮信)ㆍ최안의(崔安義)ㆍ김첨수(金添壽)ㆍ민환(閔渙)ㆍ왕석(王碩)ㆍ승신(承信) 등 9명을 함거(檻車)에 싣고 원나라로 갔다.
1345년(충목왕 1년) 여름 4월에 밀직사(密直使)에 임명되었다.
1351년(충정왕 3년) 전 만호 인당(印璫)은 전 밀직(密直) 이권(李權)과 함께 서강(西江 : 예성강)에서 군사를 주둔하여 방비하고 바다로 나가 왜적을 잡았다.
1352년(공민왕 1년)에는 포왜사(捕倭使)로서 왜구와의 결전을 회피하여 투옥되었다.
1354년 전라도만호로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이해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져 원나라의 요구로 장사성(張士誠) 토벌군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1356년 5월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이어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강중경(姜仲卿)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 8참(站)을 공략하였다. 인당이 먼저 교외로 출발하였는데, 강중경이 술에 취해 뒤늦게 도착하여 술주정을 부리고 인당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 전정(餞亭)에 이르러도 그러하였다. 인당이 신순(辛珣)에게 눈짓하여 칼을 뽑아 베고는, 왕에게 보고하기를, “중경이 두 마음을 품었기에 군법에 따라 처단하였습니다." 하였다. 국가에서는 그 까닭을 알지 못하니 물의가 분분하였다.
6월 인당(印璫)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에 이르러 파사부(婆娑府) 등의 3참(站)을 격파하였고, 7월 관제회복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원제(元帝)가 고려의 국경 침입을 구실 삼아 80만 대군으로 문책하겠다고 위협해오자, 이에 당황한 왕에 의하여 서북면 병마사 인당(印璫)이 죄를 뒤집어쓰고 목이 베어졌다. 묘는 개성 북산 효청동에 있다.<위키백과>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
소재지 충남 당진시 면천면 죽동리 산 57-1
관리자(연락처) 교동인씨대종회

 

▼ 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 사진... 아직 수정하지 않은 원본 파일입니다. 시간 되는대로 수정하여 정상적으로 발행하겠습니다.

▼ 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가 있는 죽동1리 마을회관

▼ 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 입구.

▼ 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 인당(印璫) 사당

▼ 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 경모재

 

碩城府院君印璫將軍追慕碑文(석성부원군 인당장군 추모비문)
 
공(公)의 휘는 당(璫)이시며 교동인씨 顯祖이시다. 고려말엽의 중신(重臣)이시자 명장으로 문무를 겸전(兼全)하신 분이었다. 여말(麗末)은 국가의 기틀이 흔들리는 불안했던 시대로서 동북 서북영토는 원(元)의 지배하에 있었고 서남 밤에는 왜구의 침범이 잦아 백성은 영일(寧日)이 없었다. 원(元)의 책략으로 민족정기(民族正氣)는 흐려져 사대주의의 폐풍이 널리 퍼진 이 시대에 공께서는 충혜(忠惠), 충목(忠穆), 충정(忠定), 공민왕(恭愍王)의 네 조정을 섬기시면서 생애를 통해 자주권 확립과 국방에 신명(身命)을 바치셨다.
일찍이 문과(文料)에 오르셔 충혜왕때 대언(代言 : 즉 이조의 承旨~正三品官) 충목왕一년에 밀직사(密直司 : 從二品)를 지내셨다. 충정왕 三년 八월에는 서북면만호(西北面萬戶)로서 인천근해(仁川近海) 자연도(紫燕島 : 지금 영종도) 삼목도(三木島)에 침입한 왜선(倭船) 백여척을 격퇴시켰으며 수많은 왜구를 생포(生捕)하셨다. 서기一三 五二년 공민왕一년 七월에도 교동도(喬桐島)에서 왜선(倭船)을 나포(拿捕)하시니 왕명으로 동지(東池)에 띄워 널리 관람하게 하고 공에게 동지밀직자사(同知密直司事 : 從二品)를 제수(除授)하는 한편 포왜사(捕倭使)의 중책을 맡기었다. 동왕(同王)三년 六월에는 전라도만호로서 수군(水軍) 一천을 거느리고 왜적을 무찌르셨다. 동월(同月)에 원(元)에서 장사성난(張士誠亂)이 일어나 고려에 파병(派兵) 요청이 있자 조정에서 공을 석성부원군에 장자「안(安)」을 연성군(延城君)에 봉(封)했으며 부자가 제장(諸將)과 더불어 병사 二천을 인솔하고 七월에 원군(援軍)으로 파견될 때 왕은 친히 영빈관(迎賓館)에서 열송(閱送)하였다.
공과 제장(諸將)은 원(元)에 거류중(居留中)인 고려인 二만을 합류시켜 고우성(高郵城) 육합성(六合城)전투에서 치열한 공방(攻防)을 거듭한 끝에 난(亂)을 평정하고 이듬해 五월에 환국하셨다. 동왕(同王)五년 五월에 첨의평리(余議評里 : 從二品官)에 오르시고 六월에는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 : 지금의 일선사령관으로 황주, 평양, 안주, 강계 등지 관할)의 막중한 임무를 띠시고 최영장군 등을 부사(副使)로 삼아 원정길에 오르시어 압록강을 건 너 파사부(婆娑府 : 즉 九連城) 등 삼참(三站)을 격파한 대전과(大戰果)로 민족의 숙원인 고구려 고토(故土)를 수복하였음은 국사에 명기(明記)된바와 같다. 이때 왕을 비롯한 민족자주세력의 과감한 배원정책(排元政策)과 파사부대첩(婆娑府大捷)은 원제(元帝)를 격노케 하여 국경 침입을 추궁하며 八十만 대군으로 고려를 초토화(焦土化)하겠다고 위협해 왔다. 그해 七월에 공은 참지정사(叅知政事 : 從二品)에 이르신 뒤에도 원(元)의 강압을 무릅쓰고 총병력으로 결사항쟁할 것을 주장하셨다. 그러나 왕은 재차 강경한 협박에 못이겨 부득이 서북면 공략의 전 책임을 공에게 돌려 처형한 뒤에 사죄 표찰(標札)을 원사(元使)에게 전하고 화해하였다. 불행히도 고토회복(故土回復)의 대망(大望)은 이로써 수포로 돌아갔으니 원대한 포부와 경륜을 펴지 못하고 여한(餘恨)을 품은 고혼(孤魂)이 어찌 편히 잠드셨으랴. 그러나 공은 살신성인(殺身成仁)으로 멸사구국(滅私救國)하셨으니 그 이름은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순국하신 날은 서기一三五六년 공민왕 五년 七월 三十일 무신(戊申)이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절을 기려 개성남문 종경(鍾磬)에 「첨의평리사사인당(僉議評理司事印璫)」이라 새겨 후세에 전하고 있다.
공의 배위(配位)인 정부인 해주최씨는 판밀직 안도(安道)의 따님으로 三형제를 두셨으니 첫째 안(安)은 공민왕때 전리판서(典理判書) 연성군(延城君), 둘째는 견(堅)이요, 셋째 해(海)는 우왕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셨다.
공의 遠祖인 東來始祖는 신라 유례왕때 아찬 교동백 諱瑞이시며 득관(得貫)은 고려 인종때 한림학사 교수부원군 문정공(文貞公)이신 휘빈(諱邠)이시고 조상에는 여러 고관현직을 역임한 분들이 계셨다. 顯祖이신 공의 충절과 호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대종회에서는 전국 후손들의 단성(丹誠)을 모아 이곳에 사우(祠宇)를 세워 존령(存靈)을 모시고 삼가 비(碑)를 세운다.
西紀一九八一年辛酉四月十二日
碩城府院君 二十一世孫 德山 泰星 謹誌
碩城府院君 二十世孫 溫陽 永宣 謹書
喬桐印氏大宗會 謹立<교동인씨대종회에서 인용>

▼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 인당(印璫) 추모비

▼ 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 인당(印璫) 사당

 

▼ 교동 인씨(喬桐 印氏) 충정사(忠貞祠)에 있는 승사랑 인희윤 묘(인당의 8대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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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