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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 묘

 

<현장답사나 간산을 다녀온 곳은 많은데 답사기를 올리기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사진 정리도 제대로 되지않아 일차적으로 답사기 올리기 전까지 사진을 보관하고 관리할 목적으로 사진만 보관하려고 만든 자료실입니다. 정식으로 글을 올리기 전까지만 유지하는 곳입니다. 이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
 
조선의 왕족. 인조와 후궁 귀인 조씨 사이의 2남 1녀 중 둘째이자 장남이다. 소현세자,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의 이복 동생이며 낙선군의 동복 형이다. 동복 누나 효명옹주는 권신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의 아내이다.
1639년(인조 17년) 10월 17일에 한성부 창경궁 별실에서 태어났다. 8살 때인 1646년(인조 24년)에 '숭선군(崇善君)'으로 봉해지고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책록받았다. 1648년(인조 26년)에 간택을 통해 신익전의 딸 신씨와 혼인했다.
1649년(인조 27년)에 아버지 인조를 잃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숭선군의 이복 형 효종은 비록 생모 귀인 조씨와 사이가 좋진 않았으나 그 소생인 이복 동생들에 대해서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것을 가엾게 여겨 재위 초반에는 노비를 150명씩 내려주는 등 잘 대해줬다. 그러나 2년 뒤인 1651년(효종 2년)에 김자점의 옥사에 엮여 어머니인 귀인 조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숭선군과 그 형제들에 대해 유배를 보내라는 이야기가 많았으나, 처음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서 작위만 삭탈하는 정도로 끝냈다. 그러나 대신들의 상소가 계속되어, 1년 뒤 숭선군 형제는 강화도 교동(喬桐)으로 귀양 가 한동안 소현세자의 3남 경안군과 함께 지냈고 3년 뒤엔 누나 효명옹주도 교동으로 와서 같이 살게 된다. 그러나 홍우원, 송시열, 이경여 등 신하들이 무고함을 호소하여 4년 뒤인 1656년(효종 7년) 18세 때에 풀려난 뒤 관작이 복구되었다.
이후에는 사옹도제조(司饔都提調)를 맡고, 신덕왕후 강씨의 부태묘사(副太廟事)로 모든 종친을 거느리고 3차례나 상소를 올린 끝에 윤허를 받아 역사를 원만히 집행하는 등 왕실의 크고 작은 행사에 주로 참여했다. 1680년(숙종 6년) 42세 때는 조카손자 숙종에게서 '현록대부 보사원종공신'에 봉해졌다.
1690년(숙종 16년) 1월 6일에 향년 52세로 별세했다. 숙종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앞으로 3년 동안 상을 마칠 때까지 봉록을 주라는 특명을 내렸다.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종산 해좌에 있으며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지방기념물 제6호로, 신도비 좌대 귀부(龜趺)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받았다.
부인 신씨 사이에서만 2남 4녀를 두었다. 부인 신씨는 신익전의 딸인데 고모부 중 한 명이 강문성, 민회빈 강씨의 친오빠이다.
장남은 동평군 이항(東平君 李杭)이며, 차남은 동성도정 이강(東城都正 李棡)인데, 동성도정이 아주 어린 아기 때 사망하여 실질적으로는 동평군이 독자였다. 따라서 현존하는 숭선군파는 전부 동평군의 자손들이다.
장녀는 해평 윤씨 윤세정, 차녀는 파평 윤씨 윤정호, 3녀는 순흥 안씨 안수정, 4녀는 양주 조씨 조명봉과 결혼했다.<나무위키>


숭선군(崇善君)묘 :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의 묘소이다. 군의 이름은 징(徵)이며,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를 따라 공주(公州)로 잠시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궁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공주를 그리워하더니 숙종 16년(1690) 세상을 떠날 때 공주에 묻어 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족의 무덤은 도성(都城)에서 9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중단되었고 그 후 후손에 의해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만들어졌다.
묘 주위에는 ㄷ자형으로 담장을 쌓았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장명등(長明燈: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고 좌우에는 무인석과 문인석이 1쌍씩 세워져 있다. 봉분 아랫부분은 화강석으로 둘레석을 둘렀으며, 묘비에 쓰여진 기록을 통해 숭선군과 부인의 합장묘로 영조 42년(1766)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문화재청>

 

문화재지정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
문화재명칭 숭선군(崇善君) 묘
소재지 충남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산 2-1
관리자(연락처) 전주이씨숭선군파

 

▼ 숭선군(崇善君) 묘 사진... 아직 수정하지 않은 원본 파일입니다. 시간 되는대로 수정하여 정상적으로 발행하겠습니다.

 



공주오룡리귀부 (公州五龍里龜趺)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
 
귀부는 비받침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귀부는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숭선군은 이름은 징(徵)이고,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趙氏)이다. 효종 2년(1651) 누이인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에 관계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7년(1656)에 석방되어 벼슬과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귀부는 네모난 바닥돌과 큼직한 한돌로 만들었다. 앞으로 쑥 뻗은 머리부분은 용의 모습으로 변했고, 목에는 비늘무늬를 장식하였으며, 등에는 비를 끼우는 곳인 비좌(碑座)를 갖추었다.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귀부에 비해 조각 솜씨는 떨어지나 전체적으로 힘차 보이는 조선 중기의 작품이다.<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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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