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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예전에 만들었던 블로그가 틀이 깨지고 카카오에서 운영하는 정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하는 형태대로 유지가 안되서 티스토리로 메인 블로그를 옮겼습니다. 예전 블로그에 있던 자료를 하나씩 옮기고 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은 내용이나 사진이 현재와 맞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이점 이해바랍니다. 추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내용과 사진을 수정할 예정입니다.>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 묘

 

아주 오래전에 풍수답사로 다녀온 묘역이다. 그런데 다음 블로그에 있는 글이 포멧이 자꾸 깨져 티스토리로 옮긴다. 평도공 박은, 공순공 박숭질은 모두 좌의정에 오른 반남박씨 가문의 인물들이다. 반남박씨는 조선조에서 좌의정 4명(박은,박숭질,박세채,박회수) 우의정2명(박종악,박규수)을 배출하였는데 적은 수의 씨족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한 대표 가문이 되었다.

박은 묘는 1422년 최초 양주의 중량포에 예장되었던 것을 1496년(연산군 2) 광주 고덕동으로 부인 장흥주씨와 함께 쌍분으로 조성해 이장되었고 1982년 광주가 개발되면서 문산읍 당동리 현재의 장소로 재차 이장되었다.

원형의 합장봉분 정면으로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아래 좌우로 문인석이 두 쌍씩 모두 4기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묘역 중앙에 사각의 장명등을 세웠는데 옥개석 부분은 도난을 당해 새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봉분 우측으로는 원래의 묘표와 새로 세운 묘표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그 옆으로 면봉기사비(緬奉紀事碑)가 세워져 있다.

<제 다른 블로그 '좋은터 길라잡이' 2011. 3. 13 올린 글을 옮겨옴>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앙지(仰止), 호는 조은(釣隱). 할아버지는 박수(朴秀)이고, 아버지는 고려 말의 학자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박상충(朴尙衷)이며, 어머니는 이곡(李穀)의 딸이다.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周彦邦)의 사위이며, 어효첨(魚孝瞻)의 장인이다.
문음(門蔭)으로 판숭복도감사(判崇福都監事)를 받은 뒤, 1385년(우왕 11) 문과에 2위로 급제해 권지전교시교감(權知典校寺校勘)·후덕부승(厚德府丞)을 거쳐 1391년(공양왕 3)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이듬해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다.
조선이 개창된 뒤에도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었고, 고과(考課)에 정최(政最)의 성적을 받아 좌보궐(左補闕)에 임용되었다. 1394년(태조 3) 지영주사(知永州事)로 있을 때 태조의 다섯 째 아들 이방원(李芳遠)에게 충성할 것을 약속하였다.
1397년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이듬해 발생한 무인정사(戊寅靖社), 즉 제1차 왕자의 난 때 지춘주사(知春州事)로서 이방원의 집권을 위해 지방 군사를 동원하였다. 이어 사헌중승(司憲中丞)·판사수감사(判司水監事)를 지내고 1400년(정종 2) 지형조사(知刑曹事)로 있을 때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에서 역시 이방원을 도와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방원이 왕세자가 된 1400년에는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으로 그를 보필하였다.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오른 뒤 1401년 태종의 즉위 후 중용되어 형조·호조·병조·이조의 4조 전서(典書)를 두루 역임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반남군(潘南君: 뒤에 潘城君)에 봉해졌다.
그 뒤 강원도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한성부윤·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을 역임하고, 1406년(태종 6)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는 제주도의 동불(銅佛)을 구하러 온 명나라 사신을 예의로 잘 접대해 칭송을 받았다.
이듬해 진향사(進香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참지의정부사 겸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이어 형조판서에 옮겼다가 1409년에는 서북면도순문찰리사 겸 평양부윤으로 평양성 축성을 마쳤다.
1412년에는 관향인 반남이 나주에 속하자 금천군(錦川君)으로 개봉되었으며, 겸판의용순금사사(兼判義勇巡禁司事)가 되어 옥무(獄務)에서 신장(訊杖)의 사용 횟수를 1차 30인으로 정해 합리적인 형정 제도를 시행하였다. 1414년 이조판서 때에는 고공(考功)의 행정 제도를 개선하였다.
1416년 47세의 나이로 우의정이 되어 소년입각(少年入閣)의 예에 들었으며, 이어 부원군으로 진봉되고 좌의정 겸 판이조사에 올랐다.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세자로 책봉될 무렵부터 심온(沈溫)과 대립해, 1418년(세종 즉위년) 심온의 옥사 때에는 심온의 반대 입장에서 관여했다는 세평을 듣고 있다. 1421년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고 이듬해에 죽었다.
문과 초시에서 강경(講經)을 채택하도록 강력히 주장해 시행하도록 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 묘역 :파주시 향토유적 제25호
 
평도공 박은(平度公 朴, 1370~1422)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반남(潘南), 자(子)는 앙지(仰之), 호는 조은(釣隱)으로 고려말 학자인 상충(尙衷)의 아들이며 이곡(李?)의 외손이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후덕부승(厚德府丞)을 거쳐 개성부소윤(開城府少尹)이 되었으며 조선이 건국된 후 지금주사(知錦州事)가 되어 정치 성적이 가장 높아 좌보궐(左補闕)에 전임되었다. 1397년(태조 6)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1401년(태종 1) 4조 전서(典書)를 두루 역임한 후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오르고 반남군(潘南君)에 봉해졌다.그 후 1416년(태종 16) 5월 우의정, 같은 해 11월 좌의정 겸 판이조사에 오르고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고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박은 묘는 부인 장흥주씨(長興周氏)와의 합장봉분으로 1422년 최초 양주의 중량포에 예장하였던 것을 경기도 광주를 거쳐 현재의 장소로 재차 이장하였다. 정면으로 묘비와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아래 좌우로 문인석이 두 쌍씩 모두 4기가 배치되어 있다. 또한 묘역 중앙에 사각의 장명등을 세웠는데 옥개석부분은 도난을 당해 새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봉분 우측으로는 원래의 묘표와 새로 세운 묘표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으며 그 옆으로 면봉기사비(緬奉紀事碑)가 세워져 있다. 묘역 아래로 아들 참판공 박규(參判公 朴葵)묘, 박규의 부인인 원주변씨(原州邊氏)묘, 학생공 박홍기(學生公 朴弘基)묘등 4기의 묘가 상하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위키백과>

 

문화재지정 파주시 향토유적 제25호
문화재명칭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 묘역
소재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당동리 884(박숭질묘:당동리 산 57-1)
관리자(연락처) 반남박씨(031-940-5831)

 

박은 묘역의 안내판

박은 신도비...

박은 묘 앞에 있는 아들 박규의 묘비

박은 묘역 전경...

박은 묘역이 넓어 한장의 사진으로 잡기 어렵다... 좌측

박은 묘역 우측...

박은 묘비.. 구 묘비를 새롭게 써서 세운것이다.. 진한국대부인 장흥주씨 라는 표현은 처음본다.

박은 구 묘비...

박은 묘 앞에 서있는 묘비명.. 부인과 쌍분으로 표기되었으나 합장묘다..

박은 묘의 장명등.. 옥개석은 도난당해 새로 세운것이다.

박은 묘의 백호쪽 석물..

박은 묘역의 청룡쪽 석물...

박은 묘역 후경... 답사객이 많다..

박은 묘에서 의문이 갔던 내용들이 면봉기사비 뒷면에 새겨져있다.

 

공순공(恭順公) 박숭질(朴崇質)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가(仲嘉)·중소(仲素). 할아버지는 우의정 박은(朴訔)이고, 아버지는 부윤(府尹) 박훤(朴萱)이며, 어머니는 구강(具綱)의 딸이다.
1456년(세조 2)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고, 내외직을 거쳐 1490년(성종 21)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동지중추부사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93년에는 형조판서로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빙자하여 사퇴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02년(연산군 8) 삼도입거도순찰사(三道入居都巡察使)가 되었고 1504년 우의정, 2년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 당시는 연산군의 폭정이 절정에 달하여 벼슬을 버리고자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석달 동안 등청하지 않다가 추국(推鞫: 의금부에서 임금의 명에 의하여 심문을 함)을 받은 뒤 면직되었다. 중종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1507년(중종 2)에는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시호는 공순(恭順)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숭질의 묘비... 이렇게 큰 비석이 묘 앞에 버티고 있으면 별로 좋지못하다. 부인 정씨의 이름이 연산군 때 자주 등장하는데... 오죽하면 일부러 말에서 떨어졌을까...?

박숭질 묘 청룡쪽 문인석... 재질이 안좋은지 손상이 심하다..

박숭질 백호쪽 문인석..

박숭질 묘의 청룡자락 끝.지금은 도로로 인해 잘렸지만 약 10여m 더 나가 있었을것으로 추측.

박숭질 묘의 백호자락... 우측도로로 절단되긴 했어도 힘이 넘쳐나서 후손들이 돈은 벌었을 것이다. 우측 산에 박숭질의 할아버지 좌의정 박은 묘가 있다.

박숭질 묘의 후경.. 안산이 아주 좋은데 점점 건물들이 들어서니 이것도 볼 수 없을것 같다.

 

<풍수고찰-현장토론>

ㅇ 박은 묘 : 명당이 넓고 안산이 좋아 후손의 돈이 많을 것으로 보임

ㅇ 박숭질 묘: 산진처에 썼지만 너무 내려쓴 형태, 백호가 크게 감고돌아 부자가 나옴

 

박은 묘에서 동영상

 

박숭질 묘에서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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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