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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구에 유일하게 있는 표석이 다락원 터 표석이다. 도봉산 등산할 때 마다 봐오던 표석인데 새삼 표석을 포스팅하려고 하다보니 찍은 사진이 없어서 다시한번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온 기억이 난다. 이처럼 맨날 접하는 것도 관심이나 목적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인데 뭘 하려고 찾다보면 마땅한 게 없어서 맘 먹고 다시 찾아야 한다. 흔히 쇠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이곳은 원래 관원들이 이용하던 숙박시설인 원(院)이 있던 곳인데 민간인들도 이용할 수 있었다. 함경도 등 북쪽에서 한양으로 들어가면서 거치는 곳이라 상업이 발달했던 곳인데 특히 어물을 독점으로 하여 큰 시장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도봉산역 환승주차장 부근에 다락원 터가 남아 있다. 





다락원


조선 시대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설치된 숙박 시설.

원(院)은 조선 시대 수령, 공용 여행 중인 관원, 기타 일반민의 여행 등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요 도로상에 설치된 일종의 숙박 시설이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경내에는 다락원[樓院]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터가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각 지역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가 있었다. 또한 각 도로는 대·중·소의 등급을 정하였고, 주요 거점에는 역(驛)을 두었다. 원은 주로 역과 역 사이에 배치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공용 여행에 숙박 시설로 이용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조선 개창 후 태조 즉위년 개국공신 조준(趙浚)과 배극렴(裵克廉)의 상소를 통해 원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공무 출장과 수령에게는 숙식이 무상으로 제공되었으나 연회 등은 금지되었다. 기본적으로는 공용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시설이었으나, 상인이나 민간 여행자들도 숙박 시설로 이용할 수 있었다. 다락원은 서울에서 함경도와 경기 북부 지역으로 이어지는 주요 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어 이 지역을 왕래하는 관원 및 상인 등에게 편의를 제공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다락원은 누원을 우리말로 쓴 것으로, 다락[樓]으로 된 원집[院宇]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누원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선조실록』에 정유재란(丁酉再亂) 이후 많은 향화인들이 누원에 모여 살았음은 알 수 있다. 또한 누원은 서울 동북부의 교통 요지로서 상업이 번성한 곳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특히 함경도와 경기도 북부로 이어지는 도로의 분기점에 위치하고 있어 서울로 유입되는 어물(魚物)을 이 지역의 상인들이 독점하였고 큰 규모의 장시(場市)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 도봉산역 환승 주차장 인근에 다락원 터가 남아 있다.

<디지탈도봉구문화대전에서 발췌>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만남의광장 카페 옆에 위치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도봉산역을 이용하면 쉽게 접근 가능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도봉산역 횡단보도를 건너면 쉽게 찾을 수 있다.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만남의광장 카페 우측에 위치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위치도




▼ 다락원 터(樓院店址) 표석 항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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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