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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 문화답사를 하다보면 흥선대원군과 관계되는 유적지가 의외로 많이 나온다. 대표적인 곳이 운현궁이며 부암동의 흥선대원군 별서유적지도 있다. 그런데 이런 곳은 실제로 유적지로 존재하므로 표석은 세우지 않는다. 

이곳 시흥에 있는 흥선대원군별장터는 얼마 전까지 있다가 이곳에 아파트를 건립하면서 철거되었다. 한쪽에서는 없어진 문화재를 복원한다고 엄청나게 돈을 들어가며 새로 만들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있는 유적지도 없애고 신식 건물을 지어 분양하고... 경제성장의 과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이 있지않았나 생각해 본다.

표석이름이 별장터라고 되어 있다보니 답사 시에 옆에서 어떤 부모님이 아이한테 설명할 때 부자들이 집 말고 별도로 별장을 지어서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맞는 말 같으면서도 그 당시의 사회상을 곡해한 것은 아닌지... 하기사 부자나 권력가들이 별장을 소유하지 서민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 것은 맞다.


 

 

 

흥선대원군 별장 터(興宣大院君別莊址)

 

1985년까지 서울 양반가(兩班家)의 전통가옥이었다. 이후 고정주영의 집으로 알려졌으며, 지금은 철거되어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이 집은 190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평 136평 규모이다. 구조상으로 보아 별장보다는 살림채로 보이며, 사랑채 하나에 안채가 둘이 딸린 대가(大家)의 표본이었다. 몸채는 서향이며, 아홉자형 평면을 기조로 안채는 ‘쌍ㅁ’자 형태를 이루었다. 

또한 두 안채가 하나는 ‘ㄱ’자, 다른 하나는 ‘ㅡ’자를 기본으로 하는 1고주 5량 집으로 납도리 홑처마 집이었다. 정원도 잘 가꾸어져 있었으며, 건물 뒤에서 담장이 산의 자연적 지세를 따라 기어 올라가 한국 특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문화컨텐츠닷컴에서 인용>

 

 

▼ 흥선대원군 별장 터(興宣大院君別莊址) 표석

 

 

 

▼ 흥선대원군 별장 터(興宣大院君別莊址) 표석

 

 

 

▼ 흥선대원군 별장 터(興宣大院君別莊址) 표석

 

 

 

▼ 흥선대원군 별장 터(興宣大院君別莊址) 안내판

 

 

 

 

▼ 교과서 속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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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사진 속 인물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다. 그는 영조의 현손 남연군(南延君) 구(球)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의 아버지로서,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10년간 섭정을 한 인물이다.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이다. 

 

 

 

사진은 흥선대원군이 1882년(조선 고종 19)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 톈진(天津)에 유배당했을 때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우측의 ‘고려국 대원군 광서 8년’, 좌측의 ‘梁時泰照像館(양시태조상관)’이라는 글자를 토대로 1882년 톈진(天津)의 양시태 조상관에서 촬영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톈진은 상업과 관광이 발달한 도시였으며 많은 전문 사진사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양시태 역시 이러한 사진사들 중 한 명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이 즉위하자 정치적 실권을 잡으면서 외적으로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쳐 서구 열강의 침투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그는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고 민씨 일파가 정권을 잡음에 따라 정치에서 물러난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계 복귀를 꾀하였다. 

그러다가 기회를 잡은 것이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 때였다. 임오군란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구식 군인들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던 데다가 13개월 만에 월급으로 지급된 쌀에 겨와 모래가 섞여 있자, 그렇지 않아도 정부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구식 군인들이 일으켰던 군란이다. 이때 구식 군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고 정부 고관들의 집을 부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을 뿐만 아니라,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궁궐까지 습격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사태의 수습을 위하여 흥선대원군에게 정권을 맡기게 되었는데, 대원군은 정부가 추진해 오던 개화 정책을 전면 중단시켰다. 

그러나 곧바로 민씨 세력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하게 되자 상황은 바뀌었다. 군란의 책임을 물어 흥선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하였던 것이다. 또한 일본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군란의 책임을 물어왔다. 흥선대원군은 3년 동안 중국의 텐진에서 유폐 생활을 하다가 1885년 8월에야 귀국하였다. 

이 임오군란의 결과, 조선은 청의 내정 간섭이 강화되었고, 일본과도 제물포 조약을 맺어 많은 요구를 들어줘야만 했다. 반면 개화에 반대하던 대원군의 세력들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원군은 이후 1895년 을미사변 때에도 잠깐 정계 복귀를 꾀하지만,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다시 실각하고 양주에서 은거하다가 1898년 생을 마감하였다.  

대원군은 처음 10년간의 집권기에 왕권 강화를 꾀하면서 내적인 개혁을 실시하였지만, 끝까지 강력한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끌지는 못하였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교과서 속 이미지 자료에서 인용>

 

 

 

 

 

 

▼ 흥선대원군 별장 터(興宣大院君別莊址) 표석

 

 

 

▼ 흥선대원군 별장 터(興宣大院君別莊址) 표석

 

 

 

▼ 흥선대원군 별장 터(興宣大院君別莊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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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