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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맹은 할아버지 강회백, 아버지 강석득의 묘가 비무장지대에 있어서 답사객들과 매년 한 두번씩을 다녀오는 곳이다. 정작 강희맹 묘는 시흥시에 있는데 자주는 못 가본다. 

강희맹이 살던 곳은 서울시 표석에 두 곳이나 등재되어 있다. 서울 중구에 한 곳이 있고 금천구에 한 곳이 있다. 

강희맹이 시흥땅에 둥지를 튼 것은 이숙번과 연관이 많다. 숙부인 강순덕이 이숙번의 사위인데 자식이 없자 강희맹이 강순덕의 양자로 입적하여 이숙번의 사패지를 물려 받는다. 이래저래 힘있는 사람들은 재물까지도 얻게 되는 모양이다. 강희맹의 어머니 심씨는 심온의 딸로 세종대왕의 소현왕후가 이모가 되니 인맥이 대단한 집안이었다. 

강희맹이 이곳에서 농사서적인 금양잡록을 저술했다하니 민생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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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姜希孟)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운송거사(雲松居士)·국오(菊塢)·만송강(萬松岡). 강시(姜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북면순무사(東北面巡撫使) 강회백(姜淮伯), 아버지는 지돈녕부사 강석덕(姜碩德), 어머니는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이다. 형이 인순부윤(仁順府尹)이자 화가 강희안(姜希顔)이며, 이모부가 세종이다.

1447년(세종 29) 24세로 친시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다. 1450년 예조좌랑과 돈녕판관을 역임하고, 1453년(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그 뒤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중추원부사로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부윤으로서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3등, 등준시(登俊試)에 2등으로 급제했다.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으며, 예조판서를 거쳐 1467년에는 형조판서로 특배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에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이듬해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봉되어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지고,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봉되었다. 그해에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473년에는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판중추부사·이조판서·판돈녕부사·우찬성을 역임한 뒤, 1482년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해 맡은 일을 잘 처리했으며, 또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했던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사대부로서의 관인적 취향과 섬세한 감각을 가진 문인이면서도 농촌 사회에 전승되고 있는 민요와 설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관인문학(官人文學)의 고답적인 자세를 스스로 파괴했다. 『농구십사장(農謳十四章)』은 생활 주변에서 채집한 농요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농민들의 애환과 당시 농정(農政)의 실상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강희맹의 시 중에서 그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는 평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의 시집인 『진산세고(晉山世稿)』를 편찬했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新撰國朝寶鑑)』·『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의 언해, 성종 때는 『동문선』·『동국여지승람』·『국조오례의』·『국조오례의서례』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의 오구라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는 강희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액전(額篆), 아버지와 강지돈(姜知敦) 묘표의 액서(額書), 합천홍류동체필암각(陜川紅流洞泚筆巖刻) 등을 썼다. 저서로는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 이외에 『금양잡록(衿陽雜錄)』·『촌담해이(村談解頤)』 등이 전하고 있다.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강희맹(姜希孟) 살던 곳 표석... 금양잡록(衿陽雜錄)을 급양잡록이라 적혀있다.

 

 

 

▼ 강희맹(姜希孟) 살던 곳 표석... 벽에 주소가 붙어 있다.

 

 

 

▼ 강희맹(姜希孟) 살던 곳 표석... 건물명<그린 빌리지 A동>이 보인다.

 

 

 

▼ 강희맹(姜希孟) 살던 곳 안내판이 자세하게 기록 되어 있다.

 

 

 

 

▼ 강희맹(姜希孟)이 이곳에서 살면서 집필한 농사책 금양잡록(衿陽雜錄)

 

 


▣ 연성문화 창조한 첫 농학자 

강희맹(姜希孟) 

 

<전략> 선생은 할아버지 강회백(姜淮伯)과 아버지 강석덕, 형 강희안의 시집인 『진산세고(晋山世 稿)』를 편찬했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 『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 언해』, 성종 때는『동운선』,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서례』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특히 선생의 저술로서 주목되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私撰) 농서인 『금양잡록(衿陽雜錄)』의 저술이다. '금양'은 시흥의 태종 때(1414~1416)의 이름이다. 선생이 52살 에 좌찬성에서 물러나 처가인 경기도 금양현(옛 시흥군 동면 시흥리, 현 서울시 금천구 시 흥 4동 812)에 있는 묘막에 은거하여 손수 농사를 지으며 그 곳 노농(老農)들과의 대화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지었다. 

이 농서는 조선초기의 농사기술에 관한 저서인 『농사직설』과 쌍벽을 이루는 저서이며, 농사직설이 관찬(官撰)인데 반하여 이 책은 저자 개인의 경험과 견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당시 시흥지방의 농업사정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선생은 문장 뿐만 아니라 특히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 오쿠라 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 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가 선생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생은 또 금양지방의 민담과 관직생활 중 들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촌담해이(村談解 ?)』라는 소화집 (笑話集)을 엮었다. 그 밖에도 금양지방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이 지방의 농요를 채집하여 한시로 개작한 '농구 14장(農謳十四章)' 을 살펴보면 '내용과 분위기에 맞지 않다.' 고 개작할 정도로 가요에 대한 선생의 문학적 관심 뿐 아니라 농민애를 엿볼 수 있다.

 <시흥문화원, 시흥의 인물에서 발췌> 

 

 

▼ 강희맹(姜希孟) 살던 곳

 

 

 

▼ 강희맹(姜希孟) 살던 곳

 

 

 

▼ 강희맹(姜希孟) 살던 곳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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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