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보제원 터는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안암로터리 한쪽에 있는데 표석에 대해 관심 없을 때부터 궁금해서 확인해 본 표석이다. 이곳이 예전부터 무료숙박과 병자들의 치료를 담당한 구휼기관이었다.  아마도 보제원 때문에 이 일대가 한약제 상가가 많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안암로터리는 어릴 때는 참 넓게 보였는데 최근에 방문해 보니 그렇게 넓게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이 달라진건지 아님 동심이 사라진건지... 이 일대에는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묘가 있었던 인명원 터가 있어서 같이 답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행정구역이 동대문구와 성북구로 나뉘어 있어서 미리 착안하지 않으면 두번 답사하게 되니 참고하시길....





▣ 보제원(普濟院) 터


조선시대 서울의 각 원에는 진제장이 설치 운영되었다. 진제장은 한성부에서 설치한 기아자(飢餓者)의 응급구제기관이었다.

서울의 상설진제장(常設賑濟場)으로는 동(東) · 서활인원(西活人院) 외에 홍제원 · 보제원 · 이태원이 있었다. '홍제(弘濟)' '보제(普濟)'의 자의(字意)가 이미 구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이들 원은 창설될 때부터 지방에서 서울로 밀려드는 빈민을 일시적으로 진휼하여 그들의 도성내 진출을 막아보려고 한 것 같다. 당초에는 보제원, 이태원, 동 · 서활인원에 진제장을 설치 운영하였으나 세종 19년(1437) 2월에 홍제원에 진제장을 가설(加設)하였다.


보제원은 조선시대에 여행자에 대한 무료숙박과 의지할 곳 없는 병자에 대한 치료를 담당하던 구휼기관이었다. 그리고 명예롭게 은퇴한 관리들을 위한 축하연인 기로연을 베풀기도 하였다. 국조보감에는 “기로소(耆老所) 신하들에게 보제원(普濟院)에서 연회를 베풀어 주고 술과 음악을 하사하였다”라는 기록이 존재하는 등 기로연을 베풀었다는 기사들이 다수 존재한다.


보제원은 흥인문 밖 3리 지점에 있었다. 누각이 있어 상원(上元)(정월 15일)과 중양(重陽)(9월 9일)에 기로(耆老)들이 이곳에서 잔치를 벌였다. 조말생(趙末生)의 서문이 있었는데 후기에 없어졌다. 조선시대에 이곳을 가자면 흥인문을 벗어나 동묘에 이르면 이곳에서 길이 둘로 갈라지는데 동북쪽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보제원에 닿게 된다. 이곳에서 안암동천 · 제기현 · 고암(鼓巖)을 거쳐 수유리를 지나 노원역에 이르러 동북 제2로에 연결된다.

오늘날 서울약령시로 지정된 경동한약상가가 보제원 근처에 번창하게 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 보제원(普濟院) 터 표석



▼ 보제원(普濟院) 터 표석... 안암오거리에 위치하는데 교통 때문에 도로로 들어갈 수 없어서 네이버 지도 거리뷰를 인용했다.



▼ 보제원(普濟院) 터 표석



▼ 보제원(普濟院) 터 표석



▣ 원(院)


고려와 조선시대 주요도로상에 여행자를 위해 설치한 여관. 각 주(州)·현(縣) 내의 관(館)과는 구별된다.

건물은 원우(院宇)라고 했다. 원은 지방통치와 교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시대에는 원이 사원에 부속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서로 동일시되기도 했으며, 관리는 승려들이 맡아하기도 했다. 이러한 원들은 주로 교통상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어 교역의 중심역할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보면 개경과 가까운 곳에 도적이 자주 출몰하자 인명과 통과물품을 보호하기 위해 원을 세운 듯하다. 원의 관리는 각 지방에서 맡았으나, 실제로는 소홀함으로 인해 조폐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후 조선시대 들어 1392년(태조 1) 9월에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의 상소로 여행자들의 편의를 위해 원이 수리·건설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원우는 고려시대의 사원 또는 선원(禪院)이 원으로 전환되거나, 개인소유의 주택 또는 누정(樓亭)을 개조한 것이 많았다. 그외 관가 또는 개인이 주관해 원우를 신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은 공무를 위한 여행자의 숙식을 제공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상고(商賈)나 여행자의 숙식소로 존재했다. 또한 국왕이 지방을 순시할 때나 피난길에 이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각도 관찰사가 도내의 여러 고을을 순행할 때 원에서 점심을 먹거나 마필(馬匹)을 교체했으며, 신·구 감사가 도계(道界) 부근의 원에서 교대하기도 했다. 이 원우의 관리는 서울 성저(城底:도성 10리 이내의 거리)의 원은 5부(部)에서, 지방의 원은 수령이 부근에 사는 주민을 원주로 삼아 이를 담당하게 했다.


그리하여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여 수령의 근태 여부를 조사해 그들의 인사자료로 삼기도 했다. 한편 역원(驛院)의 대로(大路)·중로(中路)·소로(小路)는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상정(國用田制詳定) 때 주(州)·부(府)·군(郡)·현(縣)의 대로·중로·소로와 함께 규정되었다. 대로는 서울에서 죽산(竹山)·직산(稷山)·개성부(開城府)·포천(抱川)까지였다.


이곳은 5호(戶)를 원주로 임명했다. 중로는 죽산에서 상주(尙州), 진천(鎭川)에서 성주(星州), 직산에서 여산(礪山), 개성부에서 중화(中和), 포천에서 회양(淮陽), 서울에서 광주 도미진(渡迷津)까지로 3호를 원주로 임명했다. 소로는 대로·중로 외의 나머지 도로이며, 2호를 원주로 삼았다. 그런데 〈경국대전〉에는 중로의 여산이 전주(全州)로, 광주 도미진이 양근(楊根)으로 바뀌었다.


원주들은 잡역을 면제받았으며, 운영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원전(院田)을 지급했다.


고려시대인 1391년(공양왕 3) 10월에 대로에는 2결, 중로 1결 50부, 소로 1결을 주었다가 1445년에 각기 1결 50부, 1결, 50부씩을 지급했던 것이 〈경국대전〉에는 1결 35부, 90부, 45부로 축소되었다. 한편 서울 성저의 동쪽·서쪽·남쪽 지역에는 보제원(普濟院)·홍제원(弘濟院)·제천정(濟川亭)·사평원(沙平院) 등 4개의 큰 원이 있었다.


이러한 원은 세조 때 세워졌다. 보제원은 동대문 밖 3리(三里) 지점에 위치하며, 3월 3일과 9월 9일에 기로(耆老)와 재추(宰樞)를 위해 사연(賜宴)을 베풀던 곳이다. 그리고 홍제원은 사현(沙峴)의 북쪽 들에 있었고, 중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오는 날에 머물며 옷을 바꾸어 입던 곳이다. 제천정은 한강의 북쪽 언덕에 위치해 한강을 유람하는 중국 사신이 맨먼저 들른 곳으로 고관들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이들이 날마다 모여들었다. 이곳은 한강의 도승(渡丞)이 관리했다. 마지막으로 사평원은 한강의 남쪽 모래언덕에 있었는데, 고려시대에는 사평진(沙平津)이었다.


이곳은 날이 저물어 한강을 건너지 못한 나그네들이 유숙하던 곳이다. 이같은 원 중에서 특히 보제원과 홍제원에는 전 2결 50부를 지급했다. 그밖에 성저지역에는 남산 남쪽에 이태원(梨泰院), 전곶교(箭串橋) 서북쪽에 전관원(箭串院)이 있다. 한편 서울에 기근이 들었을 때는 성저에 소재하는 원에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해 굶주리는 사람들을 구휼하기도 했다. 원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차차 그 기능이 상실되어갔으며, 오히려 민간에서 운영하는 기관들이 그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그로 인해 차차 원은 쇠락하여 그 기능을 역에 넘겨주거나 주막 또는 주점으로 바뀌었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 보제원(普濟院) 터 표석 위치.... 선동단 인근에 있다.



▼ 보제원(普濟院) 터 표석 위치... 안암역에서 가깝게 위치한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