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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전영택은 학창시절에 화수분 작가로 알게 되었다. 내가 아는 작가라는 범주는 학창시절에 수업시간에 듣거나 시험에 나올 만한 것을 참고서적을 통해 암기한 내용들이다. 정작 소설을 읽어 본 것은 단편소설 몇 편이고 장편은 엄두도 못 내었다. 어쩌다 내용을 아는 것은 전편을 읽은게 아니라 요약본을 읽어보고 아는 체 하는 수준이다. 그래서 작가에 대한 것을 적는 것은 심히 부담된다. 

오히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나 이문열의 삼국지,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 같은 장편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 읽고 내용까지 암기하려고 하는 내 이중적인 생각을 이런 글을 통해 반성해 본다. 얼마 전 전북 전주에 가서 마침 시간이 허락되어 혼불의 작가 최명희 문학공원을 다녀왔는데 나는 최명희 묘에 관심이 있어서 갔지만 일행 중 한 분이 혼불을 읽어 봤냐고 해서 말은 못하고 딴청만 피웠더니 더이상 묻지 않았다.ㅎ

전영택 집터는 이문동 골목길에 있어서 우연히 찾기는 아주 힘들고 일부러 찾아가야 볼 수 있는 곳이다. 이와 유사한 표석이 종로구에 있는 김창숙선생 집터 표석인데 여기도 골목길 안쪽에 있어서 찾기 힘든 곳이다. 이런 곳은 집터 위치에는 작은 팻말 정도를 붙여놓고 표석은 큰길가에 세워 널리 알리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전영택 집터 


소설가 전영택이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곳. 동대문구 이문동 327-15번지 전영택의 집이라고 알려진 이 곳에서 그가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으나, 1968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까지 살았던 곳임은 틀림없다..

전영택은 목사이자 소설가로, 189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일본에서 신학대학을 다녔으며, 문예지 <창조>의 동인이 되어 문단활동을 시작했고, 도쿄에서 학생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0년에는 미국에서 흥사단에 입단했으며, 한국에 돌아와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학계, 언론계에서도 종사했다. 소설가로서도 훌륭한 글을 남겼지만, 목사로서도 찬송가를 남겼고, 어린 아이들을 위한 동화책을 쓰기도 했다.

보통의 전영택의 문학은 기독교적인 신앙을 바탕으로 하며, 인도주의와 인간애를 지향하고 있다고 알려져있다. 그의 문학은 식민지시대의 사회문제와 개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다루는 것으로 출발하여, 광복이 되기까지 민족적 수난이나 가난을 동포애로 감싸는 인간의식을 그렸다. 광복 이후에는 주로 기독교적 신앙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민족과 개인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종교인이자 작가로서 구현하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소설『화수분』은 인간의 원시적 온정과 생명에의 외경을 사실적, 상징적으로 그려낸 그의 작품이다. 그 이외에도 그의 박애정신을 구현한 농촌소설 『소』, 허위와 가식에 찬 교회의 한 모습을 비판한 『크리스마스 전야의 풍경』, 『생명의 봄』등이 있다.

전영택은 1968년 기독교방송국에서 연설을 끝내고, 전차를 타러 가는 길에 달려오는 택시에 치여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의 빈소는 그의 자택인 동대문구 이문동 327-15에 차려졌었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 인용>



▼ 전영택 집터 표석



▼ 전영택 집터 표석



▼ 전영택 집터 표석



전영택(田榮澤)


본관은 담양(潭陽). 호는 늘봄·추호(秋湖)·불수레·장춘(長春). 평양 출생. 전석영(田錫永)의 셋째 아들이다.

1910년 평양 대성중학(大成中學) 3년을 중퇴하고 1918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문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이 학교 신학부에 다시 입학하였다. 김동인(金東仁)·주요한(朱耀翰)·김환(金煥) 등과 문예지 『창조(創造)』의 동인이 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단편 「혜선(惠善)의 사(死)」를 『창조』 창간호에 발표함으로써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3년 아오야마학원 신학부를 졸업하였고,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1930년에는 미국 패시픽신학교에 입학하는 한편 흥사단에도 입단하였다. 1932년에 귀국하여 황해도 봉산감리교회 목사, 1938년 평양 요한학교 및 여자성경학교 목사, 1942년 평양 신리교회 목사, 1948년 중앙신학교(中央神學校) 교수 등을 지냈다.


한편, 문교부편수국 편수관(1946), 재일본 동경한국복음신문 주간(1952), 대한기독교 문서출판협회, 기독선교회 편집국장(1952) 등 학계·언론계에도 종사하면서 1961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문화포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대표작으로 「천치(天痴)? 천재(天才)?」(1919)·「독약을 마시는 여인」(1921)·「K와 그 어머니의 죽음」(1921)·「흰닭」(1924)·「화수분」(1925)·「소」(1950)·「새벽종」(1955)·「쥐 이야기」(1956)·「집」(1957)·「아버지와 아들」(1957) 등의 단편이 있다.


또한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1958)·「한마리 양(羊)」(1959)·「해바라기」(1959)·「금붕어」(1959)·「크리스마스 전야(前夜)의 풍경(風景)」(1960)·「거꾸로 맨 성경」(1961)·「모든 것을 바치고」(1961)·「생일파티」(1964)·「말없는 사람」(1964) 등의 단편과 「생명의 봄」(1920) 등의 중편, 「청춘곡(靑春曲)」(1938) 등의 장편, 성극(聖劇) 「순교자(殉敎者)」(1938), 설교수필집인 『인격주의(人格主義)』(1959) 등이 있다.


그의 문학은 식민지시대의 사회 문제와 개인의 삶이 무너지는 것을 다루는 것으로 출발하여 광복이 되기까지 민족적 수난이나 가난을 동포애로 감싸는 인간 의식을 그렸다. 광복 이후에는 주로 기독교적 신앙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 민족과 개인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사실주의적 수법으로 그려 종교인이자 작가로서의 정신 세계를 구현하였다.


「화수분」은 당시 신경향파 작가들이 즐겨 다루는 소재였음에도 도식적인 사건 처리가 아닌 인간의 원시적 온정과 생명에 대한 외경(畏敬)을 사실적·상징적으로 그려낸 그의 대표작이다. 「소」는 특히 광복 후 두드러지기 시작한 그의 박애 정신을 구현한 농촌소설로, 「크리스마스 전야의 풍경」은 허위와 가식에 찬 교회의 한 모습을 비판한 것으로 각각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밖에 논설집 『생명(生命)의 개조(改造)』(1926), 전기(傳記) 『유관순전』(1953), 수필집 『의(義)의 태양(太陽)』(1955), 창작집 『하늘을 바라보는 여인』(1958)·『전영택창작집』(1965) 등을 남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전영택 집터 표석... 이문로21길 7 주소가 보인다.



▼ 전영택 집터 표석



▼ 전영택 집터



▼ 전영택 집터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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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