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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심훈은 교과서에도 나오고 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르는 분이 오히려 없을 정도이다. 소설 상록수는 안 읽어본 사람은 있어도 제목은 거의 다 들어봤을 것이다. 심훈 하면 떠오르는 곳이 몇 곳 있다. 우선 안산에 가면 상록수를 테마로 한 상록수역, 상록구가 있고 소설 상록수에 나오는 채영신의 실제 모델 최용신선생의 기념관과 묘가 있다.  또한 동작구 흑석동에는 심훈 생가 터가 표석으로 세워져 있다. 그런데 심훈이 살고 소설 상록수를 집필했던 곳은 당진의 필경사인데 필경사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는데 한 번 놓쳤더니 차일피일 미루게 되고 까맣게 잊고 지내다 작년에 당진 답사를 일부러 진행했는데 그때 필경사와 당진의 문화재를 답사하고 왔다.

필경사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을 복원하기 까지는 지자체나 기념관측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리라 짐작이 간다. 넓은 터에 필경사, 상록수문화관, 심훈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무엇보다 심훈의 묘를 안성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런데 묘는 있는둥 없는둥 별로 관리를 안 하는듯 싶다. 묘비가 있긴 한데 언뜻보면 묘비가 아니라 이곳에 있는 다른 조각품처럼 보여서 자세히 읽어봐야 이 비석이 심훈의 묘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조화라도 좀 꽃고 묘 답게 관리가 되길 바래본다. 이곳 공원에는 심훈과 연관있는 시비, 조각품 등이 있고 기념관에는 그의 일대기를 볼 수 있다. 또한 심훈의 동상과 꽃나무들이 잘 가꿔져 있다. 오후 늦게 찾았더니 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서 사진이 별로 좋게 보이지 않아 나름 노력해서 사진을 찍었다.ㅎ

심훈에 대해 자료를 조사하면서 보니 심훈 주변 인물들이 유난히 친일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런데도 심훈은 잘 버티고 교과서에도 소설, 시가 실려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마침 그런 글이 있어 소개해 본다. 

심훈의 주요 저서로 《상록수》가 유명하다. 해방 후 1949년 유고집으로 《그날이 오면》이라는 시집이 발간되었다. 시, 소설 두 대표작 모두가 교과서에 실린 인물. 그 이외에 이렇게 시와 소설 둘 모두 교과서에 실은 사람은 심훈을 제외하면 이상이 유일하다. 거기에다가 심훈이 3.1운동으로 복역하던 당시 어머니에게 썼던 편지가 중학교 1학년 국정 국어교과서에 실린적도 있으니, 교과서와는 인연이 깊은 작가이다. 민족운동에도 공헌이 있고, 동시대의 거의 모든 작가들이 자발적, 혹은 타의에 의해 일제 가담에 연루되기 시작한 시기 이전에 사망하여, 교과서에 올리기에 부담이 없는 인물이다. 다만 절친 박헌영 때문에, 조금만 더 오래 살았으면 적어도 지금처럼 기억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나무위키>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이 집은 항일시인이자 계몽문학의 선구자인 심훈 선생(1901∼1936)이 농촌계몽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후 1934년에 낙향하여 직접 설계하고 지은 곳으로, ‘필경사(筆耕舍)’라는 당호를 붙였다.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지고 북동쪽으로 서해 바다가 바라다 보인다.
주변에 몇 채의 민가와 함께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대문이나 부속채 없이 ‘ㅡ자형 단독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집 뒤로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앞쪽에는 최근 상록수문화관을 건립해 두었다. 필경사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초가집이어서 외관으로 보면 전통적인 초가집 모양을 하고 있으나 내부 평면은 1930년대 도시주택의 기능에 맞추어 생활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전면을 바라보고 우측에서 2번째 칸을 현관으로 하고 현관을 들어서면 우측에 전후 2칸을 터서 큰 방을 만들고 이 방을 집필실로 사용하였다. 현관을 들어서면서 좌측으로는 횡으로 2칸 반을 터서 마루방을 두었다. 마루방 뒤편 한쪽은 안방이고 다른 한쪽은 현관 뒤쪽 한 칸과 합쳐 부엌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2칸의 부엌 중 한 칸은 상부에 다락을 두고 안방에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택의 서측에는 앞뒤로 길게 반칸을 나누어 두 개의 화장실과 하나의 욕실을 배치하였는데 전면의 화장실은 외부에서 사용하도록 하고, 내부의 화장실과 욕실은 안방을 통해 사용하도록 하였다. 욕실에는 커다란 가마솥을 걸로 밑에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주택 내부에 화장실과 욕실을 둔 평면구조는 일본식 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화강석을 대충 다듬은 사괴석과 자연석을 혼용하여 한 단 높이로 기단을 만들고 초석 역시 사괴석을 사용하였다. 기둥은 방형 기둥을 쓰고 기둥머리는 보와 도리를 기둥에 ‘+’자로 끼우는 사개맞춤으로 짜올렸다. 민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이다. 우진각 지붕이어서 서까래는 부채살 모양의 선자서까래로 배열하였다. 다만 모서리의 추녀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가 있다.
전면과 측면에는 유리창을 달아 전통적인 세살창을 단 것보다 내부를 밝게 처리하였다. 밖에서 안으로 통하는 문을 각 방면에 두고 있는데 현관을 비롯하여 부엌, 안방, 그리고 사랑방에 각각 문을 두었다.
이 주택은 상록수의 작가 심훈 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는 점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설계는 당시 도시주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면형태 중에서 화장실과 욕실을 실내에 설치해 두는 형식을 채용하고 있다. 또한 유리창을 달아 내부를 밝게 처리함으로써 전통주거의 실내와는 다르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마루방과 사랑방 외부에 작은 베란다를 설치하여 화분을 놓도록 배려한 것은 설계자의 섬세한 마음을 엿보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인 모습은 농촌마을 경관에 어울리게 한국의 전통적인 외관을 유지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훈(沈熏)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珽)의 3남 1녀 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 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 당하였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常綠樹)」가 『동아일보』창간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지정 충청남도 기념물 제107호
문화재명칭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소재지 충청남도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 251-12
관리자(연락처) 심훈기념관

 

상록수(常綠樹)
 
심훈(沈熏)이 지은 장편소설. 1935년 동아일보사의 ‘창간15주년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10일부터 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다.
1930년대 우리 농촌은 일제의 극악한 식민지 수탈로 인하여 극도로 피폐해졌고, 이것이 심각한 국내문제로 대두되자 관에서 농촌 문제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언론기관에서도 대대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조선일보』의 문맹퇴치 운동과 『동아일보』의 브나로드(Vnarod: '민중 속으로'의 뜻임)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운동들에서 취재되고, 또 이 운동들을 고무한 대표적인 작품이 이광수(李光洙)의 「흙」과 심훈의 「상록수」이다.

ㅇ내용
고등농업학교 학생인 박동혁(朴東赫)과 여자신학교 학생 채영신(蔡永信)은 모신문사가 주최한 학생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우수 대원으로 뽑혀 보고회에서 감상담을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알게 된다. 두 사람은 학업을 중단하고서 고향을 지키러 내려가기로 약속한다. 박동혁은 고향인 한곡리로, 채영신은 기독교청년회연합회 특파로 경기도 청석골[靑石洞]로 각각 내려가 농촌사업의 기초작업에 들어간다.
두 사람은 각자의 형편과 사업의 진행 과정을 편지로 알리며 서로 의논한다. 두 사람의 동지 의식은 사랑으로 발전하지만, 3년쯤 지나 후진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 때에 혼인하기로 약속한다. 그러던 중 두 사람은 역경에 휘말리게 된다. 채영신은 과로와 영양실조로 점차 몸이 쇠약해지다가 학원 낙성식장에서 하객으로 초대된 박동혁이 보는 앞에서 맹장염을 일으켜 쓰러지고 만다. 박동혁은 악덕지주 강기천(姜基千)의 농간에 휘말리다가 투옥된다.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한 채영신은 서울 연합회의 주선으로 요코하마[橫濱]로 정양 겸 유학을 떠나나 곧 돌아온다. 다시 일에 몰두한 그녀는 각기병에 맹장염 재발로 숨을 거둔다. 출감한 박동혁은 채영신의 죽음을 알고서 비탄에 잠기나, 곧 두 사람 몫을 해낼 것을 굳게 맹세한다.

ㅇ의의와 평가
세속적 성공을 포기한 농촌운동가의 희생적 봉사와 추악한 이기주의자들의 비인간성의 대비를 통해서 민족주의와 종교적 휴머니즘 및 저항의식을 고취한 작품이다. 이광수의 「흙」과 더불어 일제 당시의 농촌사업과 민족주의를 고무한 공로로 한국 농촌소설의 쌍벽으로 평가된다. 식민지 현실을 의식한 이 작품은 계몽운동자의 저항 의식을 형상화시킴으로써 이상으로서의 계몽을 앞세우는 낭만적 수사의 한계를 벗어나, 구체적 상황에 입각한 농민문학의 기틀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주변 안내도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와 심훈기념관 안내도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안내문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는 코로나로 굳게 잠겨져 있다.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외부 전경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외부는 초가집인데 내부는 일본식 건물 영향을 받아 화장실도 배치되어 있다. 

▼ 심훈(沈熏) 조각상

▼ 심훈(沈熏)선생 묘... 필경사(筆耕舍)옆에 있다.

▼ 심훈(沈熏)선생 묘비... 묘비 답게 세우든지 아님 최소한 글씨라도 잘 보이게 써야 묘비인줄 알고 경건한 마음을 갖출 수 있지 않을까...

▼ 상록수문화관... 코로나로 굳게 닫혀있다.

▼ 상록수문화관 현판

▼ 상록수문화관 앞에는 시비 '그날이 오면'이 세워져 있다.

▼ 상록수문화관 앞에 소설 상록수의 두 주인공 최영신과 박동혁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내에는 심훈의 동상이 몇개 보인다. 탄생 100주년 맞아 세운 동상.. 뒷면에 심훈의 글이 새겨져 있다.

심훈기념관
심훈선생의 삶을 시(時)작법 구성방식인 '기-승-전-결 4단계'로 간결화하여 구성하고 중앙에 대표작품을 담고있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 심훈(沈熏)기념관

▼ 심훈(沈熏)기념관 옥상에 세워진 심훈 동상 입상... 여기에도 시비 '그날이 오면'이 함께 세워져 있다.

▼ 심훈(沈熏)기념관 개관시간 및 기념관 내부 전시실 안내

▼ 심훈(沈熏)기념관 내부... 사진으로만 올린다.

심훈고택(沈熏古宅) 필경사(筆耕舍) 인근에 심훈(沈熏)선생 아버지 집이 있는데 시간이 촉박하여 가보질 못했다. 코로나 끝나면 자녀들 데리고 이곳을 방문해 보는 것도 좋다. 인근에 여러 기념관이 있기 때문에 동선을 잘 살피면서 함께 묶어 답사를 하면 좋을듯해 보인다.

심훈 생가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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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