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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동은 내가 서울에 와서 근 20여년을 산 곳이고 부모님이 그곳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다. 그래서 다른 곳 보다 정도 많이 가고 관심도 많은 곳이다. 심훈선생 생가 터가 흑석동성당에 있어서 별 관심 없이 본 기억이 나는데 어느날 표석 답사를 하려고 맘 먹고 찾아갔더니 흑석동 재개발과 더불어 흑석동성당도 공사를 오래동안 하는 바람에 표석을 별도로 관리하여 볼 수가 없었다. 이번에 표석 작업을 다시 하려고 찾았더니 원래 위치에서 진입로 쪽으로 내 놓아서 편리하게 사진도 찍고 표석도 답사할 수 있었다. 갈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흑석동이 엄청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 심훈(沈熏)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珽)의 3남 1녀 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항저우(杭州) 치장대학(之江大學)에 입학하였다.
1923년 귀국하여 연극·영화·소설집필 등에 몰두하였는데 처음에는 특히 영화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4년 이해영과 이혼하였고 같은 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5년 조일제(趙一齊) 번안의 「장한몽(長恨夢)」이 영화화될 때 이수일(李守一)역으로 출연하였고, 1926년 우리 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듬해 도일하여 본격적인 영화수업을 받은 뒤 귀국하여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원작집필·각색·감독으로 제작하였으며 이를 단성사에서 개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식민지 현실을 다루었던 이 영화는 「어둠에서 어둠으로」라는 제목이 말썽을 빚자 개작한 작품이며 영화제작은 이것으로 마지막이었다.
그 뒤 1928년 조선일보사에 다시 입사하였고, 1930년 안정옥(安貞玉)과 재혼하였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옮겼으나 사상 문제로 곧 퇴직하였다. 1932년 고향인 충청남도 당진으로 낙향하여 집필에 전념하다가 이듬해 상경하여 조선중앙일보사에 입사하였으나 다시 낙향하였다. 1936년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영화 「먼동이 틀 때」가 성공한 이후 그의 관심은 소설 쪽으로 기울었다. 1930년 『조선일보』에 장편 「동방(東方)의 애인(愛人)」을 연재하다가 검열에 걸려 중단 당하였고, 이어 같은 신문에 「불사조(不死鳥)」를 연재하다가 다시 중단 당하였다. 같은 해 시 「그날이 오면」을 발표하였는데 1932년 향리에서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이는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되었다.)
1933년 장편 「영원(永遠)의 미소(微笑)」를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하였고, 단편 「황공(黃公)의 최후(最後)」를 탈고하였다(발표는 1936년 1월 신동아). 1934년 장편 「직녀성(織女星)」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35년 장편 「상록수(常綠樹)」가 『동아일보』창간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동방의 애인」·「불사조」 등 두 번에 걸친 연재 중단사건과 애국시 「그날이 오면」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작품에는 강한 민족의식이 담겨 있다. 「영원의 미소」에는 가난한 인텔리의 계급적 저항의식, 식민지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정신, 그리고 귀농 의지가 잘 그려져 있으며 대표작 「상록수」에서는 젊은이들의 희생적인 농촌사업을 통하여 강한 휴머니즘과 저항의식을 고취시킨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들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특히, 농민계몽문학에서 이후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본격적인 농민문학의 장을 여는 데 크게 공헌한 작가로서 의의를 지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심훈 생가 터(沈薰生家址) 표석... 흑석동성당 들어가는 입구 왼쪽편에 있다. 예전에는 본당 건물 앞에 있었는데 답사객 편의를 위해 입구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인다.

▼ 심훈 생가 터(沈薰生家址) 표석

▼ 심훈 생가 터(沈薰生家址) 표석

 

그날이 오면/ 심훈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六曺)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둘처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꺼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 시집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 1949)
<다음카페 은하수와 백합에서 인용>

 

 

독립의 강한 의지, 심훈

 

심훈의 작품으로는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노래한 『그날이 오면』과 함께, 그가 3․1 운동으로 투옥됐을 당시에 어머님께 쓴 편지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더불어 조국 독립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 다음은 심훈이「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일부분이다.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 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괴로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의 얼굴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처럼,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조차 엄숙합니다. 날마다 이른 아침 전등불이 꺼지는 것을 신호삼아 몇 천 명이 같은 시간에 마음을 모아서 정성껏 같은 발원으로 기도를 올릴 때면 극성맞은 간수도 칼자루 소리를 내지 못하며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발꿈치를 돌립니다.

어머님!
우리가 천번 만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함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데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그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 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 그러기에 나이 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워하며 하소연해본 적이 없습니다.
<문화컨텐츠닷컴에서 인용>

 

 

▼ 심훈 생가 터(沈薰生家址) 표석이 있는 흑석동성당 본당... 예전에 이 앞에 표석이 있었다.

▼ 심훈 생가 터(沈薰生家址) 표석... 성당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면서 왼쪽에 흑석지구대가 있다.

▼ 심훈 생가 터(沈薰生家址) 표석... 성당과 지구대 사이 진입로에 있다.

▼ 심훈 생가 터(沈薰生家址) 표석위치

▼ 심훈 생가 터(沈薰生家址)라고 검색하면 충남 당진에 필경사가 나온다. 이곳은 심훈선생이 만년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상록수를 집필하던 곳이다. 역사적 의의가 있어서 이곳에 심훈기념관을 만들었다. 또한 경기도 안산에 상록구라는 행정명이 있는데 이곳에 심훈의 상록수 주인공 채영신(최용신)을 기리는 유적지가 있다.

▼ 심훈 고향집이 있는 충남 당진시 송악읍 부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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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