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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폐사지 월남사지(月南寺址)

 

전라남도 절간을 돌아보기 위해 4월초순에 길을 나섰다. 본래 3월말에 남도를 가게 되면 매화와 벚꽃을 동시에 볼 수 있는데 이번에는 분주한 시간을 피해 간다고 한 주 늦게 출발 했는데 매화, 벚꽃은 떨어져서 땅바닥에 꽃잎만 흩날리고 꽃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파릇한 잎사귀들이 나무마다 올라오고 있어서 위안으로 삼고 여행을 이어갔다.
절간을 찾을 때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려서 생각보다 운치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봄에 다녀온 곳을 1년여 지난 지금에사 글을 올리려고 하니 모든게 낮설게 느껴진다. 사진 위주로 여행기를 옮겨본다.
월남사지는 답사를 계획하고 찾은 곳이 아니다. 점심 식사를 하려고 식당을 찾았는데 유채꽃이 너무 아름다워 주위를 돌다가 우연히 월남사지를 알게 되어 들어갔다. 답사를 하다보면 우연히 알게 되는 곳도 종종 있게 된다. 이곳은 천년고찰인데 폐사가 된 뒤 관심을 못받고 지금까지 절간으로 복원되지 못한 곳이다. 평지에 위치하는데도 폐사지로 남아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폐사지에 돌로 된 것만 남는 것인데 여기도 석탑1기와 비석1기가 보물로 지정되어 화려했던 과거를 대변해 주고 있다.

 

 

월남사지(月南寺址)
 
전라남도 기념물 제125호. 월남사의 창건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고려승 진각초창 유이규보비(高麗僧眞覺初創有李奎報碑)’라 하여 송광사 제2세인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월남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시대 임진·정유왜란을 겪으면서 소실되고 그 뒤 복원불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17세기 중반 이미 폐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월출산 남쪽 평지에 위치한 월남사지에는 현재 마을이 형성되어 민가들이 들어서 있으며, 건물터로 보이는 기단부와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절터 안의 백제계 모전석탑(模塼石塔)은 법당터의 전면으로 추정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또 최근에 현 모전석탑 서측(向左)의 민가 장독대에서 석탑의 옥개석이 발견되었는데, 현 석탑의 주변에서 수습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월남사지에는 원래 2기의 석탑이 있었던 것 같다.
현 모전석탑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 월남사지석비가 있다. 이 비는 이규보가 비문을 지은 진각국사비로, 현재 비신 일부가 완전히 떨어져나간 상태이나 기단부의 귀부(龜趺)는 완전하게 남아 있다.
월남사지의 전체 규모는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였던 것 같다. 현재 외곽 담장의 흔적이 잘 남아 있는데 동서방향인 전면의 길이가 175m, 남북방향인 측면의 길이가 185m로서 총면적은 1만여평에 달하고 있다.
가람배치 형식은 전체적으로 보아 완만한 경사지를 4개의 단으로 만들고 그 단부에 축대를 쌓아 점차적으로 오르면서 각각의 단에 평평한 대지를 조성하여 건물들을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좌우측으로도 5개의 단을 두어 각각의 단에 대지를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축선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건물과 다르게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월남사지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와 자기류뿐이다. 그중 기와류는 문양·태토(胎土)·소성도 등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말에서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유물은 극소수이고 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를 이룬다. 자기류도 완·접시·병·대접 등 다양하게 수습되었는데,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들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 (康津 月南寺址 三層石塔) : 보물298호
 
월남사터에 남아있는 삼층석탑으로, 단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바닥돌 위에 기둥 모양의 돌을 세우고 그 사이를 판돌로 채운 뒤 넓적한 맨윗돌을 얹어 조성하였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매우 높으며, 2층 몸돌부터는 그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였으며, 밑의 받침은 3단을 두었다. 지붕돌의 윗면은 전탑에서와 같이 계단식 층단을 이루었고, 추녀는 넓게 수평의 직선을 그리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탑신의 모든 층을 같은 수법으로 조성하였고 위로 오를수록 낮은 체감률을 보인다. 탑의 머리부분에는 받침 위에 꾸밈을 위해 얹은 석재 하나가 남아 있다.
이 탑은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상 백제 양식을 많이 따르고 있다. 기단 및 탑신의 각 층을 별도의 돌로 조성한 것이나 1층의 지붕돌이 목탑에서처럼 기단보다 넓게 시작하는 양식 등이 그러한 특징이 된다.
대표적인 백제탑이라 할 수 있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과 비교해볼 수 있으며, 전라도 지역에서는 규모나 양식으로 매우 중요한 석탑이라 할 수 있다.<문화재청>

 

문화재지정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125호
문화재명칭 월남사지(月南寺址)
소재지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53
관리자(연락처) 강진군청

 

▼ 월남사지(月南寺址) 전경... 월출산 아래 좋은 입지인데 왜 폐사지가 되었을까?

▼ 월남사지(月南寺址) 안내문...

▼ 월남사지(月南寺址) 서탑지

▼ 월남사지(月南寺址) 삼층석탑 안내문...

▼ 월남사지(月南寺址) 삼층탑의 설계도

▼ 월남사지(月南寺址) 삼층석탑(보물298호)

▼ 월남사지(月南寺址) 금당지...

▼ 월남사지(月南寺址)는 월출산 아래에 위치한다. 봄날에 바라본 월출산이 아름답다.

▼ 월남사지(月南寺址)에서 앞쪽 안산을 바라본 모습... 귀인봉이 아름다운데... 꼭대기에 고압선이 박혀있다.

▼ 월남사지(月南寺址) 유적 발굴지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 보물313호
 
월남사는 고려 중기에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창건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진각국사의 성은 최씨이고 이름은 혜심(慧諶)으로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출가를 하게 되었다. 출가 후 보조선사 밑에서 수도를 하였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고종 21년(1234)에 57세로 입적하였다. 월남사 터에 서 있는 이 비는 절을 창건한 진각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받침돌인 거북은 입에 구슬을 문 상태로 긴 목을 빼어들고 네 발을 단단히 짚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매우 강렬하고 사실적이다. 발톱에서 보이는 현실성이나 목과 머리조각의 세부표현 또한 전체적인 균형과 잘 어우러져 한층 돋보인다. 비몸은 원래 매우 컸다고 하나 윗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아랫부분만 남아 있으며, 표면이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당시의 문장가인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비를 세운 시기는 고려 고종 때로 추정된다.<문화재청>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안내문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입구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비각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康津 月南寺址 眞覺國師碑) : 보물313호

▼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비각 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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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