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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무섬마을

 

영주가 한동안 동양대학교 표창장 문제로 시끌시끌 했었는데 좋은 의미로 오르내리는 경우가 훨씬 많은 고장이다. 특히 부석사가 위치하고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이 위치하는 곳이다. 근자의 선비촌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영주는 소백산을 빼놓을 수 없는데 어느 해인가 소백산을 올랐는데 그때는 단양에서 올라갔다 내려올 때는 구인사로 해서 내려왔다. 개인적으로는 희방사도 참 좋은 절이라고 기억한다. 


영주를 여러 번 갔었지만 항상 머리 속에 개운치 않은 것이 있었는데 무섬마을을 못가본 것이다. 인근 다른 곳을 답사할 때 거쳐가리라 맘 먹었지만 매번 시간에 쫒겨 지나치기만 했었는데 이번에 영천을 가면서 다행스럽게 답사할 수 있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수도리(水島)라 한다. 처음에는 물섬마을로 불리다 시간이 흐르면서 ㄹ이 탈락해 무섬마을로 되었을 것이다. 이런 형태의 터를 물돌이마을이라고 하는데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 영월 한반도지형 등 산과 물이 발달한 곳에는 이런 지형이 쉽게 눈에 띈다. 

물돌이 마을은 풍수에서는 매우 귀한 터로 여긴다. 물이 돌아나가는 안쪽으로 기운이 모아지기 때문에 만사형통으로 좋은 터가 된다. 물이 환포하면서 흘러가는 안쪽은 항상 좋은 기운이 있다고 믿으면 된다.


무섬마을 뒤쪽에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영주에서 흘러내려오는 서천이 합수되어 마을을 한바퀴 돌면서 나가고 있어 마을의 삼면을 감싸 마치 섬처럼 된 지형이다. 천연지형으로 육지속의 섬처럼 외부와 단절되고 고립되어 오히려 현대에서는 전통을 간직한 전통마을로 곽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의 가장 큰 명물은 S자로 휘어진 체  강을 가로질러 세워진 외나무다리이다. 1970년대 마을로 들어오는 다리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외부와 소통했던 유일한 다리였는데 콘크리트 다리가 준공되고나서는 그 다리가 쓸모없어서 철거되었으나 근자에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다시 복원한 다리이다. 외나무 다리는 나무다리로 사람 한 명이 딱 건너갈 수 있는 폭인데 강 한가운데 쯤 가서는 물살이 세서 어지러워 서있기조차 힘들었다. 중간 중간에 마주오는 사람들이 피해갈 수 있도록 곁다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관광객들이 몰리면서 상당히 밀집된 장소로 변했다. 강 건너 갔다오려면 사람들이 많을 때는 혼잡을 감안하고 다녀와야 한다.


마을 안쪽에는 오래된 전통가옥들이 잘 보존 되어 있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뒤섞여 있는데 이 마을은 반남 박씨와 선성김씨(예안김씨)의 집성촌인데 현재는 마을에 40여호가 거주한다고 카페 주인께서 귀뜸해 줬다.
무섬마을에 처음 들어오신 입향조는 박수선생인데 그 때 지은 만죽재 고택을 풍수적으로 살펴보니 상당한 안목으로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 좌우 용호를 안고 중심맥 아래에 포근히 감싸주는 곳에 터를 정했다.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아야 몇 백년을 이어 내려올 수 있는 것이다.
이 마을 출신에는 유독 애국지사가 많다. 이는 선비정신으로 뭉쳐지고 같은 집안 씨족으로 마을이 형성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형적인 영향도 있을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무섬마을이 전국 단일 마을 중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고 나온다. 마을 끝쪽에 아도서숙이라는 가옥이 있는데 2015년 복원된 곳이다.


벼르고 찾은 무섬마을이어서인지 볼거리, 체험거리가 많았지만 역시나 시간에 쫒겨 한바퀴 돌아나오기 바빴다. 선비들의 강인한 의지가 모여 독립운동을 펼치고 외부의 물질만능을 잘 피해서 전통을 유지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곳도 기본적인 경제활동이 되도록 하회마을처럼 입장료를 받고 관람을 시킬 필요가 느껴졌다. 마을에 어르신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불쑥 들어가려니 여간 미안한게 아니었다. 
최근에 주차장 뒤쪽에 세워진 청퇴정에 오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내성천의 굽이 흐르는 물길이 보이면서 서늘한 바람이 볼을 스치니 초여름 더운 날씨도 강바람에 멀리 달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영주 무섬마을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무섬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예천의 회룡포, 영월의 선암마을과 청령포와 같이 마을의 3면이 물로 둘러 쌓여 있는 대표적인 물돌이 마을이다.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영주천이 합수되어 태백산과 소백산 줄기를 끼고 마을의 삼면을 감싸듯 휘감아 돌아 마치 섬처럼 육지속의 섬마을로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살아가고 있는 마을이다.
강변에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편으로는 울창한 숲이 있어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무섬마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으로 반남박씨인 박수가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고, 이후 조선 영조때 그의 증손녀 사위인 예안김씨인 김대가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 두 집안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현재 약 48가구에 100여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가옥중 38동이 전통가옥이고, 16동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예안김씨는 선성김씨라고도 하는데 현재 종친회에서 정식으로 부르는 이름은 예안김씨라고 한다. 해우당과 만죽재가 특히 알려져 있으며, 김규진 가옥, 김위진 가옥 등 9점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와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해우당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수도교를 건너자 마자 바로 왼편으로 보이는 가옥이다. 해우당은 19세기 말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낙풍이 지은 집인데 해우당은 그의 호이다. 해우당 김낙풍은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조언자였다고 한다. 해우당 고택에 있는 현판은 바로 흥선대원군의 글씨라고 한다. 안채에는 역시 흥성대원군이 쓴 '대은정'이라는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무섬마을에서 또하나 눈여겨 보아야 할 가옥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는 만죽재이다. 반남박씨의 입향조인 박수가 1666년(헌종7년)에 지은 집으로 무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이다. 만죽재는 무섬마을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만죽재의 편액은 석운 박기양의 글씨이다.
또한 마을의 중앙에는 19세기 초반에 지어진 만운고택이 있다. 민속자료 제118호로 지정되어 있는 집이며, 이집을 지은 만운 김휘걸의 호를 따서 지은 집이다. 바로 시인 조지훈의 처갓집이다. 조지훈은 시 '별리'를 통해 이곳 무섬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고 한다.
이외에 무섬마을의 대표적인 부잣집 가옥인 김위진 가옥(문화재 자료 제360호), 담장없이 지어진 김정규 가옥(문화재 자료 제 362호), 실학자 박규수의 글씨가 남아 있는 박재연 고택 등도 둘러 보아야 할 전통 가옥이다.
무섬 마을에는 또 한가지 빼놓지 말아야 할 볼거리가 있다. 바로 350여년간 무섬 마을과 강건너를 연결시켜준 외나무다리이다. 1979년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지 무섬마을의 유일한 통로 역할을 한 외나무 다리는 길이가 무려 150m에 이르고, 폭은 30cm에 불과한 다리 이다. 폭이 좁아 긴 장대에 의지한채 건너야 한다. 외나무 다리는 해마다 새로 다리를 만들었는데, 장마철이면 불어난 강물에 다리가 떠내려 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도교의 건설로 사라졌던 외나무 다리는 최근 옛모습 그대로 복원되어 매년 10월에 '외나무다리 축제'를 만들어가는 중심이 되고 있다. 원래 외나무 다리는 3개가 만들어 졌었다고 한다. 농사지으러 가는 다리, 장보러 가는 다리, 학동들이 학교 가는 다리. 지금은 농사지으로 가는 다리 하나만이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대한민국구서구석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278호(2013.08.23 지정)
문화재명칭  영주 무섬마을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무섬로234번길 31-12
관리자(연락처)  무섬마을보존회

 

▼ 영주 무섬마을 항공사진

▼ 영주 무섬마을

▼ 영주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수도교... 우측 멀리 외나무다리가 보인다.

▼ 영주 무섬마을 안내판과 배치도

▼ 영주 무섬마을 지도와 답사순서도

▼ 영주 무섬마을 관광안내... 서랍식으로 되어 있어서 뚜껑을 열면 안내책자가 나온다. 관광지에 흔히 있는 홍보용인줄 알고 그냥 지나쳤는데 나오면서 보니까 안내책자 보관소였다. 위에다가 안내책자 또는 관광안내물이라고 쓰고 한부씩만 가져가세요~ 글자도 위에다 썼으면 얼른 이해했을 것 같다. 관광안내소도 다리 끝에 있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있어서 안내책자를 구하지 못한 체 답사를 했다.

 

 
 해우당 고택

 
이 건물은 선성(宣城) 김씨 입향조 김대(金臺)의 셋째집 손자 영각(永珏 ; 1809~1876)이 1836년에 건립하였고, 고종(高宗) 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해우당(海愚堂) 김낙풍(金樂灃, 1825~1900)이 1879년에 중수(重修)하였다. 가옥은 마을 삼면을 휘감아 흐르는 내성천에 놓인 수도교를 건너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오는 □자형 가옥이다. 배치구성은 평탄한 대지에 배산하여 북서향한 정면 5칸, 측면 6칸 규모이고, 사랑채 우측 1칸이 돌출된 편날개형이다. 평면구성은 대청 3칸(6통칸)을 중심으로 좌측에 상방 2통칸, 우측에 안방 2통칸을 배치하고, 안방 앞으로 정지 칸반·고방 반칸을 연달아 배열하였다. 정지는 안마당쪽으로 개방되어 있고, 정지와 고방상부에는 통칸에 우물마루를 깐 다락을 두었다.
상방 앞쪽으로는 상방정지 1칸, 중방 1칸, 고방 1칸으로 좌익사를 꾸몄다. 상방정지는 안마당쪽으로 벽체없이 개방시키고 상부에는 상방에서 이용하는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사랑채는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작은사랑 1칸, 마루방 1칸을 두었고, 우측에는 큰사랑방 2통칸에 연이어 마루방 1칸을 들었다.
사랑방 2칸중 후면 한칸은 ㄱ자로 꺾어 책방 1칸을 두었고, 안마당 사이에는 벽장 반칸과 안채로 통하는 비밀통로 반칸이 설치되어 있다. 마루방 뒤쪽에는 빈소방(못방) 1칸을 두었는데, 마루방과 빈소방은 □자형 평면에서 우측으로 1칸 돌출되어 있다. 큰사랑채는 작은 사랑채보다 다소 지대를 높여 통주의 두리기둥을 세우고 툇마루에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이 가옥의 평면구성에서 주목되는 것은 먼저 넓은 대청공간의 배치와 다양하고 조리있게 배치된 수장공간의 활용이다. 또 하나는 안채와 사랑채가 대각선상에 배치되는 것이 통례이나 여기서는 안채와 사랑채가 직선형으로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기단은 얕은 자연석 쌓기에 상면을 모르타르 덧마감을 하고 그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았다. 기둥은 안대청 전면과 사랑채 툇기둥만 두리기둥이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을 세웠다. 상부가구는 안대청이 5량가이고, 큰사랑채가 전퇴 5량가이다. 지붕은 큰사랑채만 별도의 팔작지붕으로 꾸몄고, 나머지는 맞배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영주시 문화관광에서 인용>

 

▼ 영주 무섬마을 해우당 고택... 마을 입구에 있다.

▼ 영주 무섬마을 해우당 고택은 상당히 넓은 터에 자리 잡았다.

▼ 영주 무섬마을 해우당 고택

▼ 영주 무섬마을 해우당 고택 안채

▼ 영주 무섬마을 답사는 우측으로 돌아 외나무다리를 갔다가 맨 우측끝(마을의 청룡끝자락)에 있는 무섬자료전시관까지 둘러보고 돌아올 때는 마을 안쪽길로 접어들면 크게 어긋남이 없이 돌아볼 수 있다. 첫번째로 만나는 안내문이 시인 조지훈 처가이다.

▼ 영주 무섬마을 김뢰진 가옥(만운고택)

▼ 더운 날씨에 초가정가가 있어 시원스럽게 보인다. 미니어쳐로 꾸민 정자... 

▼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 다리... 다리를 건너 갔다 오려고 들어섰는데... 말 그대로 외나무다리여서 교행이 쉽지 않다. 강 중간쯤에는 물살도 빨라서 머리가 빙빙 돌고 어지럽다. 관광객들이 많아서 중간에 되돌아왔다.

▼ 영주 무섬마을 김정규 가옥... 사랑방앞에 툇마루를 놓아 폐쇄적인 내부공간에 개방성을 시도했고 평면구성상 이 마을에 보이는 6칸 까치구멍집과 같은 평면구성을 취하면서도 Y축의 확장성을 도모하는 변형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 영주 무섬마을 마당 넓은 집... 뒤로 산이 잘 받혀주고 앞쪽으로 넓은 마당과 내성천이 환포하는 좋은 터이다. 다만 마당이 터져있어 기운을 가두지 못하니 이를 어찌할까...

▼ 영주 무섬마을 초가삼칸... 왼쪽 할머니집은 꽃으로 집 전체를 꾸몄다. 너무 보기 좋았다. 할머님의 마음이 읽혀진다.

▼ 영주 무섬마을 풍경

▼ 영주 무섬마을 청룡자락 끝에는 예전에 텃밭으로 쓰던 곳인데 이곳에 무섬자료전시관을 세웠다. 무섬마을에 대한 내력과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 무섬자료전시관 앞에 있는 섬계 박선생 시비

◆ 박제익(1806 ~ 1841년)

자 학중, 호는 섬계이다. 박수의 5대 주손이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사서삼경을 소년의 나이에 완성하였다. 영주시에서 복원한 만죽재 내에 있는 섬계초당은 당시 후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설립한 서당으로 만죽재의 이전 당호는 섬계초당이었다. 섬계 박제익이 학문을 연구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섬계회를 주최하여 계회에 참석한 선비들과 시문을 나누었다. 일찍 돌아가셔서 후학의 계보는 잇지 못하였으나 후대에 미친 글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문장이 영남일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벼슬보다는 선비로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안내문, 영주시청, 2017년)

▼ 무섬자료전시관 앞에 있는 조지훈의 별리 시비

'별리(別離)'- 조지훈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치마 자락에 
말 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이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고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 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임하

 

▼ 무섬자료전시관

▼ 무섬자료전시관에 전시된 해우당 원본(흥선대원군 글씨), 오헌 원본(박규식 글씨)

▼ 영주 무섬마을 금강초당

▼ 영주 무섬마을 김규진 가옥... 이 집은 6간 까치구멍집의 초기변형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가옥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까치구멍집으로 전열에 봉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사랑방과 정지를 두었으며, 후열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상방과 안방을 두었다. 이집은 일반적인 6간 까치구멍집의 평면에서 마굿간이 있어야할자리에 사랑방을 둔 것이 평면상의 특징이며, 사랑방의 전면에는쪽마루를 설치하고 외부로 통할 수 있도록 양개 세살문을 달았다. 마굿간 자리에 사랑방이 위치한 것은 까치구멍집의 초기변화단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겹집의 발달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

▼ 영주 무섬마을 김위진 가옥(조은구택)... 19세기말에 지은 □집으로 관리상태가 양호하다. 

▼ 영주 무섬마을 담장과 골목길...

▼ 영주 무섬마을 무송헌 종택... 이 마을 선성김씨 입향조인 김대가 터를 잡고 살았던 종택이다. 무송헌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천문학자인 김담(金淡, 1416~1464)의 호인데 천문학자로 큰 업적을 남긴 무송헌 김담(1416~1464년)의 후손으로 선조를 기리는 의미로 무송헌종택이라 부른다. 

▼ 영주 무섬마을 박천립 가옥(사무당)... 박천립 가옥은 1923년경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며 2002년 중수하였는데 당호는 현 소유주인 박천립의 고조부인 박승후(朴勝厚)(1848~1921)의 호를 따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주 수도리 박천립 가옥은 원래 초가 까치구멍집이었으나, 1975년 지붕개량사업으로 기와집으로 고쳤다가 최근 초가로 복원하였다. 

 

영주 무섬마을 답사기를 한편으로 올릴려고 하다보니 분량이 많아졌는데 최근 다시한번 무섬마을을 다녀올 기회가 생겨 처음에 가지 못했던 뒤산 입수룡 확인과 강건너 환학암을 다녀왔다. 그래서 글이 너무 커져 두 편으로 나눴으니 이해 바란다.

 

(경북 영주)무섬마을(외나무다리)(2 of 2)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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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