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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최부자집 종가 충의당(忠義堂)

 

이번 가을에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을 포함하여 안강까지 문화재 위주로 2박3일 답사를 다녀왔다. 신라왕릉을 체계적으로 답사하고자 했지만 매번 시간에 쫒겨 제대로 답사를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마음 먹고 신라왕릉 완전정복을 추진해서 무사히 다녀오게 되었다. 날씨가 너무 더운게 흠이 되었지만 비가 오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었다.

경주답사를 다 마치고 신경주역으로 가야했는데 약 1시간의 여유 시간이 있었다. 그냥 있지 못하고 뭔가 하나라도 더 봐야할것 같아서 예전부터 미답지를 적어둔 자료를 찾아봤더니 신경주역 인근에 최진립장군 유적지가 있었다. 처음에는 계획에도 없었지만 마침 최진립 장군 유적이 가까이에 모두 있어서 묘소(울산 울진)만 제외하고 당일 모두 답사할 수 있었다. 묘소를 보지 못한게 뭔가 찜찜해서 묘소는 결국 3일 뒤에 부산에서 올라오면서 울산에 들러 통도사와 함께 답사를 하게 되었다.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은 정무공 최진립(1568∼1636)이 살았던 곳으로 가옥의 사랑채에 해당되지만 종가 전체를 충의당으로 부르고 있다. 처음에는 당호를 흠흠당이라 했는데 1760년경 건물을 수리한 후 충의당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현재도 안채에서 후손이 기거하고 있어서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외부에서만 건물을 답사했다.
인근에 충의공원과 최진립장군 동상, 정충비각, 용산서원과 신도비 등 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정무공 최진립장군 묘 바로가기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9호. 조선 중기의 무신 잠와(潛窩)최진립(崔震立)의 생가로, 충의당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다. 우측으로 난 대문채를 들어서면 우측에는 사당(祠堂)이 있으며, 정면 좌측에는 충의당과 경모각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충의당 뒤로는 흠흠당·고방채·정침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각각 자리잡아 전체적으로는 튼 口자형의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다. 충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인데 좌측 2칸은 전면에 퇴칸을 둔 온돌방으로 꾸미고, 우측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가구는 3량가의 간결한 구조인데 대청 상부의 대량(大樑) 위에는 원형판대공(圓形板臺工)을 세웠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평면은 좌로부터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연접되어 있다.
흠흠당은 정침 우측의 중사랑채 기능을 가진 건물로 4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사당은 전면에 퇴칸을 둔 3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민가의 사당으로서는 매우 화려하고 섬세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경상북도 시도민속문화재 제99호
문화재명칭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492
관리자(연락처) 경주최씨

 

 

최진립(崔震立)장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최득정(崔得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순릉참봉 최삼빙(崔三聘)이고, 아버지는 최신보(崔臣輔)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안릉참봉 황임종(黃林鍾)의 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최계종(崔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인솔하고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한 데 이어 양호(楊鎬)·권율(權慄)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였다.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呂島萬戶兼宣傳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607년 도총도사에 제수되자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1615년(광해 7) 부사(府使) 때 능창군(綾昌君) 전(佺)의 추대사건에 연루되어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사면되어 가덕첨사(加德僉使)를 제수받았다.경흥부사·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하였다. 1634년 전라수사를 거쳐서 1636년 공주영장으로 병자호란을 맞자 감사 정세규(鄭世䂓)를 따라 참전하여 용인 험천(險川)에 이르러 청군을 만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저서로는 『정무공기실(貞武公紀實)』 2권이 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 경주용산서원 위치도

▼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과 충의공원

▼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 안내문

▼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 정문

▼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 내부

▼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 내에 있는 충의사

▼ 최진립장군 기념관

▼ 경주 충의당(慶州 忠義堂)

▼ 충의공원

老者誰不能戰獨不能死耶(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 

▼ 충의공원 내에 있는 활인당 재현

▼ 충의공원에 있는 최진립 장군 동상

▼ 충의공원에 있는 충노비각...

▼ 충노비각 앞 비... 최진립 장군은 용인 험천전투 시 자신을 따라온 종 옥동, 기별에게 집으로 가라 일렀으나, 그들은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忠奴)가 되지 못하리오 라며 기어이 싸워 전사하였다. 후손들이 그 충성심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두 종의 제사를 함께 모신다. . 

▼ 최진립 장군이 직접 심었다는 회화나무...이 회화나무는 최진립 장군이 직접 심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을사늑약 당시 고사(枯死)했다가 1945년에 갑자기 살아났다는 기이한 전설을 품고 있으며, 한국전쟁 때도 화재가 나는 바람에 둥지가 다 타버렸지만 다시 살아났다고 하니 불사수가 아닐까?  

▼ 최진립 장군 충의비각

▼ 최진립 장군 신도비 안내문

▼ 최진립 장군을 배향한 경주 용산서원

 

 

정무공 최진립장군 묘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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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