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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영동 생가 탐방(송시열,김문기,박연,김자수)

 

옥천 답사를 준비하면서 금강이 구비구비 흐르는 곳에 눈이 멈췄다. 이런 곳에는 분명 기운이 모이는 곳이므로 인물들이 나올만한 곳이다. 눈을 크게 뜨고 지도를 확대해 보니 역시나 이곳에 여러명의 유명인 생가들이 보인다. 먼저 다녀오신 분들의 자료를 종합해서 생가 탐방으로 다녀왔다. 역시 이곳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막아 놓은 곳이 있었지만 특별히 들어갈 이유도 없고 주변 산세와 물길위주로 확인하고 왔다.

우암 송시열유허비가 있는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는 구룡마을이라 하는데 우암선생이 일룡이고 나머지 팔용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마을에 구룡마을 유래비를 세워놓고 있다. 우암선생유허비가 있는 곳이 생가터인줄 알았는데 다른 자료를 살펴보니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우암의 부친 수옹 송선생 유기비가 있는데 그곳이 생가라고 한다. 답사 때 알지 못해 다녀오진 못했다. 우암선생유허비 옆에는 곽자방정려문이 있어서 의아해했는데 곽자방이 바로 송시열의 외할아버지로 임란 때 조헌과함께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신 분이다.

사육신 중의 한 분인 김문기는 1977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으로 인정 받아 유허비가 있는 곳에 사육신현창기념비를 세워 놓았다. 후손들이 선조의 죽음까지도 의미있게 모시려고 부단한 노력을 한 흔적이 보인다. 예전에 어디서 들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많은 노력을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여튼 후손들의 합심이 선조님의 희생을 뜻깊게 만들었으니 후손들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김문기 유허비는 옥천과 영동 경계에 있는데 조금만 더 가면 영동에 난계 박연 생가가 있다. 이곳은 특별히 관리하지 않는듯 항시 개방형태로 열려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낮으막한 산들이 빙둘러 있는데 청룡 끝자락에 난계 생가가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용맥은 부실하지만 전체적으로 아늑한 마을이다. 영동군은 난계 박연과 국악을 관광자원화 하여 생가 뿐만 아니라  묘지 인근에 국악박물관 국악체험촌을 만드는 등 여러방면에 국악과 연계되는 시설을 설치했다.

김자수 유적지는 김자수선생이 태어났고 그의 손자인 김영년이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일전에 김영년 묘를 답사했는데 아주 멋진 사격들이 천심십도를 이루며 자리잡고 있었다. 그때는 이곳 유적지가 있었는지 알지 못해 답사를 못했는데 이번에 알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보니 전체적으로 마을 뒷산이 마을을 끌어안고 있는 형상으로 좋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마을 앞으로 영동천이 휘감고 나가는데 백호 끝자락이 역관으로 수구를 잘 막아주고 있어서 기운이 마을로 몰려드는 곳이다. 그런데 마을 앞 뒤로 철길이 지나고 있어서 좋은 기운이 달아나는 형태라 아쉬움이 남는다.

옥천, 영동지역의 구곡수로 흐르는 영동천, 금강 지류의 환포지형에는 좋은 기운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유명인의 생가가 들어서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환포지형은 틀림없이 기운이 모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곳이다.  

 

옥천 송시열 유허비(沃川 宋時烈 遺墟碑)
 
옥천 송시열 유허비(沃川 宋時烈 遺墟碑)는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1979년 9월 29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45호로 지정되었다.
유허비란 한 인물의 행적을 기리고, 그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시열 선생을 기리고 있다.
우암 송시열(1607∼1689) 선생은 옥천 지방에서 출생한 조선의 대유학자이다. 그의 유학사상은 이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조선 인조 대 부터 숙종 대에 이르는 4대에 걸친 노론의 대표로서 정계에서 크게 활약하였고, 뛰어난 학식으로 많은 학자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비는 현재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직사각형 비몸을 올리고 지붕 모양의 머릿돌을 갖춘 모습이다. 비몸 앞면에는 '우암송선생유허'라는 비명칭을 해서체로 새겨 놓았고, 뒷면에는 '숭정후삼무술이월일'이라 새겨 건립연대를 밝히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조선 정조 2년 1778년이다.<위키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충청북도 기념물 제45호
문화재명칭 옥천 송시열 유허비(沃川 宋時烈 遺墟碑)
소재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134-2번지
관리자(연락처) 충청북도

 

▼ 옥천, 영동 유명인 생가 위치

▼ 옥천 송시열 유허비(沃川 宋時烈 遺墟碑)가 있는 구룡마을 회관 앞에 있는 마을자랑비

▼ 옥천 송시열 유허비(沃川 宋時烈 遺墟碑)

▼ 옥천 송시열 유허비(沃川 宋時烈 遺墟碑) 전면, 후면

▼ 옥천 송시열 유허비(沃川 宋時烈 遺墟碑) 옆에 있는 곽자방 정려비... 곽자방은 우암선생의 외조부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조헌선생을 도와 싸우다 금산전투에서 전사하신 분이다.

▼ 옥천 송시열 유허비(沃川 宋時烈 遺墟碑) 원경

 

 

옥천 김문기 유허비(沃川金文起遺墟碑)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백지리에 있다. 1984년 12월 31일에 충청북도 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었고, 백촌사상연구소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김문기(金文起, 1399∼1456)의 본관은 김녕(金寧)이고, 초명은 효기(孝起)이며, 호는 백촌(白村)이다. 어릴 때부터 효행이 뛰어나 향리인 백지리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
그는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한 이후, 병조참의·함길도관찰사·공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456년(세조 2) 박팽년(朴彭年) 등과 단종복위를 모의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하였으며, 1778년(정조 2)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을 죄를 풀어버림)되었다. 1978년 서울특별시에서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허총(許塚: 가묘)을 봉안하였다.
비석은 1804년(순조 4)에 세운 것인데, 1846년(헌종 12)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넓은 공터에 돌길을 내고 좌우에 얕은 향나무를 심어 비각으로 향하게 하였다. 비신(碑身)의 높이 120㎝·두께 25㎝, 전체 높이 200㎝로 보호비각 안에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옥천 김문기 유허비(沃川金文起遺墟碑) 앞쪽에 김문기선생 사육신현창기념비가 있다.

▼ 옥천 김문기 유허비(沃川金文起遺墟碑) 전경

▼ 옥천 김문기 유허비(沃川金文起遺墟碑)

▼ 옥천 김문기 유허비(沃川金文起遺墟碑)에서 바라본 조안산...

 

 

난계 박연선생 생가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하고당1길 14-17
난계 박연 선생은 고려우왕 4년인 1378년 8월 20일 이곳에서 출생 태종5년(1405년)인 28세에 생원이 되었고, 34세(141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교리, 관습도관제조, 악학별좌, 대제학 등을 역임후 세조 2년(1456년)에 삼남 계우가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당할뻔 하였으나, 세 임금에 봉직한 공으로 화를 면하고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으로 돌아와 살다가 세조 4년(1458년) 3월 23일 81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0년 5월 안채(39m²), 사랑채(21.81m²)를 학술용역을 근거로 복원하였다. 생가의 평면은 정면3칸 측면은 전후퇴가 있는 겹집에 전면퇴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고 한켠에는 부엌과 곡식창고를 부설한 고미반자에 우진각의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부속채는 1동으로 외양간, 광과 방1칸인 초가지붕으로 되어있다.<대한민국구석구석에서 인용>

 

▼ 난계 박연선생 생가 안내문

▼ 난계 박연선생 생가 입구... 마을의 청룡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 난계 박연선생 생가 대문

▼ 난계 박연선생 생가

▼ 난계 박연선생 생가 앞 안산... 마을의 백호자락이 앞쪽을 막고 있다. 물은 역수가 되어야 좋은데 이곳은 순수로 빠져 나가는 것으로 보인다.

 

 

영동 김자수유적(永同金自粹遺蹟)
 
충청북도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에 있는 고려 말의 절의지사(節義之士)로 경주김씨(慶州金氏) 중시조인 김자수와 그 손자 김영년(金永年)의 세거지(世居地) 관련유적.
충청북도 기념물 제41호이다. 김자수(생몰년 미상)의 자는 순중(純中), 호는 상촌(桑村)으로 1374년(공민왕 23)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충청도관찰사·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고려말 정세가 혼란해지자 모든 관직을 버리고 향리인 안동(安東)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 태종이 형조판서로 불렀으나 거절하고 자결하였다. 죽은 후에 묘비문자(墓碑文字)를 만들지 말 것을 유언하였으며, ‘평생충효의(平生忠孝意) 금일유수지(今日有誰知) 일사오휴한(一死吾休恨) 구원응유지(九原應有知)’라는 절명사(絶命詞)를 남겼다.
어릴 때부터 효행이 극진하여 현재 경북 안동시 안기동에 효자비가 전한다. 이숭인·정몽주 등과 교유가 두터웠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東文選)』에 그 시문이 전한다. 한편 그 손자 김영년은 조선 문종 때에 강릉판관을 지낸 이후 영동 각계리에서 여생을 후학양성에 힘썼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영동 김자수 고가(永同金自粹 古家) 용맥도... 마을을 완전히 감싸고 있으며 물길 또한 역수로 나가서 좋은 기운이 머무는 곳이다. 철길이 앞 뒤로 나있는 것은 흠이 된다.

▼ 영동 김자수 고가(永同金自粹 古家) 안내문(충북 기념물 제41호)

▼ 영동 김자수 고가(永同金自粹 古家)

▼ 김자수선생 손자인 강릉판관 퇴헌 김영년 유허비... 

▼ 영동 김자수 고가(永同金自粹 古家)는 개방되지 않아 담장 너머로 사진을 찍었다.

 

강릉판관 김영년(金永年) 묘(김자수 손자)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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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