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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최부자집 파조 최진립장군 묘

 

경주 답사에서 최진립 장군 유적지를 뜻하지 않게 답사한 후 부산에 있는 딸 집으로 갔었다. 짐을 전해줘야 해서 갔는데 올라오려다 문득 최진립장군 묘가 울산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근 통도사가 당일 금강계단을 개방하는 날이어서 같이 묶어서 답사를 진행했다.

최진립장군 묘는 울산과학기술원 경내에 있다. 정확한 표현은 원래 이곳이 경주최씨 사패지 였던 곳인데 울산과학기술원이 들어선 것이다. 다행히 답사하는데는 별문제가 없이 찾아갈 수 있다.

울산과학기술원(유니스트라고 한다.)에서 교직원아파트 404동을 찾으면 쉽게 답사할 수 있다. 진입하는 초입에 안내석이 크게 서있다. 길을 따라 100여m 가다보면 높은 계단이 나오는데 그 끝에 최진립장군 묘가 있다. 이런 곳은 기운이 멈추지 못해 흔히 재물이 약하다고 보는데 경주최씨 최부자집 파조이신데 어찌된 일일까? 웃자고 해본 소리지만 후손들이 진입 계단을 낼 때 정면으로 잘 못 낸 것이다. 진입계단을 정면으로 내면 안된다.

최진립 장군 묘역은 현무봉에서 힘있게 입수하고 좌우 용호가 잘 감싸주고 앞쪽에서 관쇄되어 바람을 막아주는 곳으로 100대 명당에 손색이 없어보인다.

최진립 장군 묘 위쪽에 장남 최동량 묘가 있는데 부친 묘를 아래에 쓰다보니 궁여지책으로 윗쪽으로 역장을 한듯 보인다. 학교가 들어선 건물들도 최진립장군 묘역의 안산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어서 무척 다행스럽다.

 

경주 최부자집 파조 최진립장군 유적지  바로가기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1568년(선조 1) 1월 2일 ~ 1636년(인조 14) 12월 27일
조선 중기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참전한 의병장이자 무신.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경주 최씨 정무공파의 파조이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는 그의 7대손이다.
1568년 1월 2일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종9품 참봉을 지낸 아버지 최신보(崔臣輔)와 어머니 평해 황씨(平海 黃氏) 황임종(黃林鍾)의 딸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3살 때부터 경주부 부남면 이조리(현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로 이주하여 살았는데, 같은 해 어머니를 여의고 새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났다. 이후 5촌 당숙인 진사(進士) 최신린(崔臣隣, 1550년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5세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생 최계종(崔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전했고, 종6품 부장(部長)을 지내다가 1594년(선조 27) 단독별시 무과에 병과 3등 269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1597~1598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 100명과 함께 서생포에 침입한 일본군을 무찌르고 도산 싸움에서 권율 밑에 종군하여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도만호 겸 선전관, 훈련원 부정, 오위도총부 도사, 가덕진 수군첨절제사, 공조 참판, 경기‧공청(충청)‧황해 수군 통제사,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의 관직을 지냈다. 다만 1615년에 능창군 추대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함경도 갑산도호부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후 사면되기도 했다.
1626년(인조 4) 종3품 경흥도호부사(慶興都護府使)에 제수되어 재직하던 중, 청렴한 몸가짐과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두 차례에 걸쳐 포상을 받기도 했다. 1630년 정3품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고, 같은 해 특지(特旨)로 경기도 수군절도사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인 1631년(인조 9) 병을 이유로 사직하려 했는데 '의리에 어긋나고 분수를 벗어났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한때 논죄되었으나, 다음날 왕명으로 중지되었다.
이후 종3품 교동도호부사(喬桐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1633년 종4품 가선대부 행 용양위 부호군에 제수되었다가, 경기도 수군절도사와 덕원도호부사 등에 제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그해 7월 정3품 공주 진영장(公州鎭營將)에 제수되었으며, 69세의 노구를 끌고 청군과 싸우다 그해 12월 27일 용인 험천 전투에서 순절했다. 전사 1년 후 시신이 수습될 당시를 기록한 글에 따르면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전투 시 자신을 따라온 종 옥동, 기별에게 집으로 가라 일렀으나, 장군 전사 후 그들은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忠奴)가 되지 못하리오 라며 기어이 남아서 싸우고, 주인을 일평생 지키느라 이미 환갑을 넘긴 늙은이였던 그들도 결국 함께 전사한다. 그 충성심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도 최진립의 후손들은 두 종의 제사를 함께 모신다. 당대엔 어떻게 양반이 노비에게 절을 할 수 있냐고 다른 양반들에게 욕을 먹었으나 그럼에도 꿋꿋이 모시고 종들을 기리는 비각까지 세웠다고.
순절 후 청백리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 정무공(貞武公)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인조가 직접 사액제문을 내리고 정려각을 세우게 하였으며 경주 용산서원(龍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또한 사후에 신도비가 세워졌는데 신도비 건립에 노론과 남인 인사들이 함께 동참할정도로 범정파적인 추모의 대상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사당인 충렬사는 현재 북한 땅인 두만강 부근 경원군에 있기에 참배할 순 없다.
저서로는《정무공실기(貞武公實記)》 2권이 있다.<나무위키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묘
소재지 울산 울주군 언양읍 반연리 산 157(울산과학기술원 경내)
관리자(연락처) 경주최씨정무공파

 

경주 최부잣집
 
최진립의 아들 최동량 때부터 본격적으로 가문의 부를 축적하기 시작했다. 최동량은 양란이후 정부의 적극적인 황무지 개간과 수로시설 건설 장려의 흐름에 발맞춰서 경주 내남면 이조리 일대의 토지들을 개간하고 형산강의 물줄기를 끌어들여 수로시설을 건설해 이양법을 도입한 결과 큰 부를 쌓게 되었다. 집안의 종들에게 일종의 성과급제를 도입해 생산력을 증대시켰으며 일반적인 대지주들이 두던 중간관리직인 마름을 두지 않아 소작료를 비교적 낮게 받기도 했다.
최진립의 손자 최국선은 소위 명화적(明火賊)이라 불리는 도적떼의 침입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의 경험을 교훈삼은 최국선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이가 없도록 하라는 마음가짐으로 곳간을 열어 사람들을 먹여살렸고, 이는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으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흉년때 지주들이 다급한 처지의 농민들의 땅을 싸게 사들여서 재산을 불렸지만, 오히려 최부잣집은 흉년에는 땅을 사지 말라는 가훈을 세웠다. 그리고 집안의 재산은 1만석 이상을 넘지않도록 한다고 규정했는데 이렇다보니 집안의 소유토지가 늘어나더라도 1만석을 넘을수 없으니 그 남은 이익이 자연스럽게 소작인들에게 돌아가는 구조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일대의 주민들은 오히려 최부잣집의 재산이 늘어나는걸 원했고 누군가가 땅을 매각하려 한다면 앞다퉈서 최부잣집에 소개할 정도였다고 한다. 경영학적으로 본다면 이윤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일정수준의 이윤을 유지하면서 지역주민들의 신망을 얻는 경영방식을 채택했다고 볼수있는데 이런 신망이 최부잣집이 무려 12대 400여년을 이어오며 부를 지키는 근간이 되었다.
12대손 최준(1884-1970)의 대에 이르러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최준은 가문의 전 재산을 털었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에 경주군 대표로 참여해서 자금을 기부했고, 이로인해 1년여간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1921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조선독립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이곳에 명단을 올리기도 했다. 이무렵에 백산 안희제를 만났고, 안희제의 제안으로 백산상회에 투자라는 형식을 빌려 독립운동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기부했다. 또한 최준의 동생들도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최준의 동생 최완은 일제의 모략에 말려들어서 국내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결국 옥사하는 아픔도 있었다. 해방이후 백범 김구가 최준을 만나서 최준이 보내준 자금을 독립운동에 소중히 사용했다고 감사를 표했고, 최준은 백산 안희제를 떠올리며 그자리에서 안희제의 고향인 경남 의령 방향으로 절을 했다고 한다.
최준은 해방 이후에는 나라를 위해 교육사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남은 전재산을 털어 현재의 영남대학교의 전신인 대구대학을 세우는 등 그 업적은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이후 최준은 1990년 독립운동 활동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나무위키에서 인용>

 

▼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묘 용맥도와 위치

▼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묘... 울산과학기술원 교직원아파트 404동 옆으로 진입한다.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입구 진입로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원경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전경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석물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갈명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갈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상석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입수도두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후경... 용호가 잘 관쇄되어 있다.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 묘  동영상

최진립장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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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량(崔東亮)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명(子明), 호는 송정(松亭). 월성 출신. 아버지는 병조판서에 증직된 최진립(崔震立)이며, 어머니는 유윤렴(柳允濂)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규합하여 가던 도중 아버지가 용인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반구(返柩)하였다. 1641년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제수되었고, 그 뒤 경사(京司)의 봉사(奉事)·별좌(別坐) 등을 역임하였다.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침략하여 연경(燕京)으로 천도하고 순치(順治)의 연호를 반포하자, 이에 분격하여 언양현의 오연산(烏淵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1646년 상의원직장(尙衣院直長)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649년 지평현령(砥平縣令)에 임명되었으나 체직(遞職)을 상소하였다.
1652년(효종 3) 개령현감(開寧縣監)에 취임하였고, 1656년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에 임명되었다가 곧 용궁현감(龍宮縣監)이 되었다. 외직에 있을 때에는 구폐를 혁신하고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송정유사(松亭遺事)』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의 장남 최동량(崔東亮) 묘... 아버지 묘 위에 있다.

▼ 최동량(崔東亮) 묘갈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의 장남 최동량(崔東亮) 묘 입수도두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의 장남 최동량(崔東亮) 묘 후경... 앞쪽 탐랑에 향선을 맞추었다.

▼ 정무공(貞武公) 최진립(崔震立) 장군의 장남 최동량 묘  동영상

최동량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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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