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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초청 터(焰硝廳址)

 

염초청(焰硝廳) 터는 조선시대 화약을 제조하던 관아 터이다. 염초청은 임진왜란 때 설치되어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전시를 대비해오다가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면서 폐지되었다. 현재 이곳은 광복 후부터 조성된 방산종합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염초청(焰硝廳)은 조선시대 화약을 제조하던 관아로서 임진왜란 때 이곳에 본청이 설치되었다. 관아의 규모는 112칸으로 비교적 큰 것이었다. 고려시대 말부터 이어온 화약제조 기술이 이어져 염초청은 조선의 국방기술의 중심에 있었던 관청이었다. 조선시대 염초청은 도성에 2곳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는 이곳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서울역 근처 염천교(鹽川橋)에 위치하고 있었다. 염천교라는 이름의 유래부터가 염초청 앞에 있다고 하여 염청교(焰廳橋) 혹은 염초청교(焰硝廳橋)라 불리다가 후대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또한 이곳 주변을 방산동(芳山洞)이라 하였는데, 1760년대 청계천의 준천(濬川) 때 강바닥을 파낸 흙을 근처 마전교(馬廛橋)와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쌓아두면서 주변에 꽃을 심었는데 그 향기가 아름답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68년에는 염초청을 조선 후기 훈련도감(訓鍊都監) 예하 관청인 하도감(下都監)으로 이전하였고, 1881년 하도감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면서 그곳의 터는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 훈련원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의 대우 차이에 불만을 품고 구식 군대가 궐기하여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말미암아 별기군의 운영에 관여하던 일본인 13명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조선에는 청군(淸軍)과 일본군이 동시에 진주하게 되는데, 이때 청군의 장수 황사림(黃士林)이 거느린 부대가 이곳 염초청에 잠시 주둔하였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한 1882년에 하도감과 염초청은 폐지되었고, 이후 임오군란의 배후로 의심받은 흥선대원군은 청국에 4년간 유배를 떠나게 되었으며, 이 사건은 1894년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제는 하도감 터와 그 주변의 서울 성곽을 철거하고 훈련원 공원과 경성운동장을 지었는데, 이 과정에서 염초청 터도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광복 후부터 조성된 방산종합시장이 자리잡고 있다. 2008년 인근 동대문운동장을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신축하는 과정에서 염초청 관련 ‘초(哨)’ 자가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기도 하였다.<서울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염초청 터(焰硝廳址) 표석

▼ 염초청 터(焰硝廳址) 표석은 청계천변에 있어서 주변은 오토바이 등으로 어수선하다.

▼ 염초청 터(焰硝廳址) 표석... 청계5가지하쇼핑센터 1번 출입구에 있다.

▼ 염초청 터(焰硝廳址) 표석의 청계천 반대편 풍경

▼ 염초청 터(焰硝廳址) 표석이 있는 청계5가 주변 로드뷰...

▼ 염초청 터(焰硝廳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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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