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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우연히 을지로 입구역을 지나는데 도화서 터 표석이 보였다. 직감적으로 뭔가 이상하다 느끼고 바로 확인해 봤더니 표석 위치가 그 새 바뀌어 있었다. 

원래 우정국 건물 옆에 위치해 있어서 나름 생각하기를 지금도 이곳이 조계사 인근이어서 그림하고 연관이 많은 동네구나 하고 생각했었는데 쌩뚱맞게 을지로입구역으로 옮기고 보니 도화서의 그런 운치는 확실히 반감 되는 느낌이 든다.

 

을지로입구역 4번출구와 3번출구 사이에 위치하는데 이곳은 킥보드 주차장이 함께 있어서 조금 어수선하고 표석 주변에는 노점상 것으로 보이는 박스 등이 쌓여있어서 아쉬움이 많다.

시내 표석답사를 할 때는 서울시따르릉자전거를 이용하면 무척 편리하다. 저렴한 비용으로 시간도 절약하고 힘들이지 않고 많은 표석을 답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포스팅을 위해서 얼마 전에 또한번 다녀왔는데 을지로 입구역을 시작으로 청계천, 종로, 무교동, 정동길, 북촌, 삼청동까지 한나절에 모두 돌아볼 수 있었다. 다음에 다녀오시는 분들도 저처럼 서울시 따르릉자전거를 이용하시길 권해 드린다.

 


 

 

도화서(圖畵署)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도화원이 1463년(세조 9)과 1469년(예종 1) 사이의 어느 때인가 도화서로 개칭되었다. 도화서는 예조에 소속된 종6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어진(御眞) 제작, 궁중의 각종 행사를 그리거나 풍경을 사생하는 등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일체의 회사(繪事)를 관장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제조(提調)는 예조판서가 맡았고 관원은 종6품 별제 2명이 있었다. 화원(畵員)의 정원은 20명인데 이들에게는 잡직(雜職)이 주어졌으며 선화(善畫 : 종6품) 1, 선회(善繪 : 종7품) 1, 화사(畵史 : 종8품) 1, 회사(繪史 : 종9품) 2로 모두 8과(窼)가 있었다.

 

관직을 맡은 사람의 임기가 만료된 뒤에도 계속 근무시킬 때에는 서반체아직(西班遞兒職 : 종6·7·8품의 3과를 두었음)으로 바꾸어주었다. 그밖에 그림을 배우는 생도(生徒) 15명, 배첩장(褙貼匠) 2명, 차비노(差備奴) 5명, 근수노(跟隨奴) 2명이 소속되어 있었다. 별제는 화원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였는데, 화원은 천한 공장과 다를 바 없었으므로 재주가 뛰어나도 그 자리에 가능한 한 앉히지 않고 사대부 가운데 그림에 밝아 화격(畵格)을 잘 아는 자를 임명했다.

 

화원의 선발은 예조에서 담당했는데 예전의 취재조(取才條)에 의하면 죽(竹)을 1등, 산수를 2등, 인물과 영모는 3등, 화초(畵草)를 4등으로 정해놓고 이중 두 과목을 선택하여 시험을 치렀다. 채점 규정은 4등의 화초 과목에서 잘된 것은 통(通)으로 2분, 보통 것은 약(略)으로 1분을 받았는데 이것을 기준으로 1등씩 올라갈 때마다 1분씩을 더해주었다. 즉 인물과 영모에서 통을 받으면 3분, 약을 받으면 2분을 받았다. 조선 후기에 실무주관자인 별제가 폐지되고, 화원이 20명에서 30명으로 늘고, 전자관(篆字官) 2명이 추가되는 등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인 골격은 한말(韓末) 순조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음백과에서 인용>

 

▼ 도화서 터(圖畵署址)... 

 

▼ 도화서 터(圖畵署址) 위치...

 

▼ 도화서 터(圖畵署址)... 주변에 퀵보드가 있어서 어수선하다.

 

▼ 도화서 터(圖畵署址)... 원래 조계사 인근 우정총국 건물 앞쪽 보도에 있었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

 

▼ 도화서 터(圖畵署址)

 

▼ 도화서 터(圖畵署址)... 표석은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도화서 터 표석은 자리를 잘 잡은 것 같다.

 

▼ 도화서 터(圖畵署址)...주변이 조금만 더 깨끗해졌으면 좋겠다.

 

▼ 도화서 터(圖畵署址)... 

 

▼ 중구 표석 위치...

 

▼ 도화서 터(圖畵署址) 위치

 

▼ 예전 도화서 터(圖畵署址)...

 

▼ 예전 도화서 터(圖畵署址)... 뒤에 보이는 건물이 옛 우정총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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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