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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정 터(老人亭址) 표석을 처음 찾아갈 때는 걸어서 간 것 같다. 지도만 보고 역에서 출발하여 갔는데 한참을 올라가도 안보였는데... 나중에 찾고 보니 남산 순환도로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이 표석은 맨 처음 찾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있다. 요즘 같이 수시로 표석의 위치가 바뀌고 내용이 바뀌는 시대에 한 자리에서 뚝심있게 버티는 것도 줏대 있어 보이고 힘이 있어 보이니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표석 찾아다니다 많이 지친 듯 하다.

자동차로 가도 좋지만 남산순환도로를 산책하면서 찾아보는 것도 좋다. 실제로 남산골한옥마을과 장충단을 연계한 풍수문화답사를 이곳에서 진행하는데 그때마다 한번씩 찾아간다. 

서울시 기념표석에 정자가 의외로 많다. 아마도 풍광이 좋은 곳에 정자를 많이 지어서 이를 기념하려고 한 듯 한데 너무 많은 것 같다.



▣ 노인정 터(老人亭址)


풍은부원군(豐恩府院君) 조만영(趙萬永)의 노인정(老人亭) 터는 익종(翼宗, 1809~1830, 효명세자) 장인인 풍은부원군 조만영이 지었다는 노인정(老人亭)이 있던 곳이다. 조만영은 그의 딸이 익종의 왕비가 되고, 그가 낳은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자 동생인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안동 김씨에 대립하여 세도정치를 한 인물이다. 노인정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6길 30에 있었다.

이 노인정의 이름은 남쪽 하늘의 별자리인 노인성(老人星)에서 빌어왔다고도 하고, 조만영이 만년에 이 정자에서 교유하던 이들이 관직에서 물러난 늙은 관료들이었던 데서 그 명칭이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노인정 주변은 풍양 조씨들의 근거지가 되었는데, 이를 나타내는 것이 노인정과 가까운 곳에 있는‘조씨노기(趙氏老基)’ 바위글씨이다.

이 정자는 1894년(고종 31) 일본의 강요로 내정개혁 문제에 대해 7월 10일부터 15일까지 3차례에 걸쳐 내아문독판(內衙門督辦) 신정희(申正熙)와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사이에 협상이 진행되었던 장소로, 갑오개혁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도 하다. 이 협상의 결과 조선이 일본의 내정간섭안을 거부하자 일본은 7월 23일 경복궁을 점령한 뒤, 서울의 조선병영을 습격하여 무장을 해제시켰다. 그리고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데 걸림돌이 된 청과 전쟁을 시작하였다.

노인정은 1936년까지만 남산기슭에 그 모습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정자 대신 1993년에 설치한 표지석만 서울특별시 중구 필동로 6길 30 일대의 공동주택 진입로에 남아 있다.

<서울중구 문화관광 문화재에서 인용>


▼ 노인정 터(老人亭址) 표석


▼ 노인정 터(老人亭址) 표석... 남산순환도로 바로 아래에 있다.


▼ 노인정 터(老人亭址) 표석은 남산 순환도로 '남산1-23'에서 내려가면 바로 만난다.


▼ 노인정 터(老人亭址) 표석... 남산순환도로에서 내려와 보면 바로 보인다.


▼ 노인정 터(老人亭址) 표석... 필동체육공원 밑에 위치한다.


▼ 중구 장춘단 부근의 표석 현황


▼ 노인정 터(老人亭址) 표석 위치... 순환도로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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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