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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 터(南池址)는 내가 표석을 답사하기 이전부터 본 듯 하다. 그 때는 숭례문 앞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느 날부터 이 표석이 빙빙 돌려가며 세워지더니 지금은 숭례문에서 서울역이 보이는 길 우측모퉁이 정확하게는 HM빌딩 앞 보도에 세워져 있다.

남지(南池)는 한양 비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초기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지을 때 부터 흔히 말하는 정도전의 남면설과 무학대사의 동면설에 등장하는 관악산 화기에 의한 궁궐 화재논쟁에 비보방책의 하나로 들어있다.

조선 정궁 경복궁은 정도전의 의견이 채택되어 남면(남향)으로 지었는데 풍수적으로 볼 때 북한산 화기와 관악산 화기가 심해서 궁궐에 불이 날 우려가 높다고 보았다. 그래서 여러가지 비보방책을 강구했는데 관악산에서부터 출발한 화마를 차단하는 비보를 표시하면... 한강-남지-숭례문현판-청계천-광화문해태상-경회루-금천-궁궐내부 비보... 등 수없는 비보방책을 강구해 놓았다. 

이곳 남지(南池)는 그동안 여러번 메워졌다 다시 파기를 반복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러다보니 최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당파에 연계되어 남지(南池)를 파면 남인들이 득세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전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者들이란....ㅎ


 

▣ 남지 터(南池址)

 

한양의 지세는 풍수적 관점에서 살펴 보면 주산인 북악이 오행상 화산(火山)에 해당하고 남쪽에 위치한 관악산의 형상이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과 같아, 이 화기를 누르기 위하여 여러가지 비보(裨補)를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남지(南池)인 것이다.

즉 숭례문의 편액을 세로로 써서 비보를 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崇' 자는 마치 불꽃과 같은 형상이고 '禮' 자는 오상으로 火이니 불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을 취해 불로써 불을 막기위한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숭례문 밖에 연못을 조성해 화재의 위험을 막고자 하였다. 이는 다분히 주술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 즉 화마(火魔)는 험상 궂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연못을 파 놓으면 화마가 지나가다 자기의 험상 궂은 얼굴을 보고 놀라 자지러 진다고 믿는 데서 비보를 취하였다. 궁궐의 월대 네 모서리에 '드므'라는 통을 비치하고 물을 담아 놓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서울에는 남지 외에도 흥인문 밖에 동지(東池), 모화관 북쪽에 서지(西池) 등의 연못이 있었다. 서울 숭례문 밖에 있었던 남지는 연꽃을 심어놓아 연지(蓮池)라고도 하였다.

<야초실용풍수지리학회 발췌>

중구 남대문로5가 1번지 부근, 곧 숭례문 남쪽에 있던 큰 연못으로서, 서울 남쪽에 있던 연못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남쪽 연못, 한자명으로 남지라고 했으며, 또 연을 심어 유명하였기 때문에 연지라고도 불렀다. 이곳은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의 집터였다고 한다. 조선시대 남인들이 모여 노는데, 이 못의 연꽃이 무성하면 남인이 흥왕해지고, 서편 연못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이 흥왕해졌다고 전해온다. 이규경(李圭景)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남인이 세력을 펼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하였다.

한때 연못이 황폐해져 그 터를 없애고 시전으로 활용하자고 했는데 허목(許穆)이 연못을 준설한 직후 1674년에 복상문제로 남인이 집권하게 되었고 또 순조 23년(1823)에 연못의 토사를 걷어내고 물을 채워 옛날의 모습을 찾게 되자, 천주교도 이가환(李家煥)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된 채제공(蔡濟恭)이 복직되고 남인으로 급제한 사람이 4명이나 되었던 일이 있으므로 남지 때문에 남인이 득세한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지명사전에서 인용>

 

▼ 남지 터(南池址) 표석... 지금은 서울역 쪽으로 약30m 이동해서 설치 되어 있다.

 

▼ 남지 터(南池址) 표석

 

▼ 남지 터(南池址) 표석... 이 일대는 수시로 변화되어서 1년만 지나도 다른 세상에 온 듯 하다.

 

▼ 남지 터(南池址)에서 출토된 청동용머리거북상... 물을 상징하는 비보조각상 현무상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6년 5월 29일.  언제 메꾸어졌는지 모르는 숭례문 앞 남지터에서, 한 일본인이 회사 건물을 짓기 위해 지하 기초 공사로 땅을 파던 중, 지하 10척 깊이에서 돌로 만들어진 석함(석실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이 발견되었다. 이 석함 안에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머리는 용의 모습이나 몸통은 거북인 청동 용머리 거북이 들어 있었다.

「청동용머리거북」은 ​발견된 직후인 1926년 1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관된 이후, 최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해 왔으나, 일반에 공개 전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문화재청이 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 일제 강점기 조선 문서철"이라는 문서를 열람한 후, 이 유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청동용머리거북」은 음양오행상 물을 상징하는 현무(玄武)로 보인다.​ 현무는 물을 상징하는 동물로 거북이와 비슷한 모습인데다, 숭례문 앞에 연못을 만든 것이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한 것으로 본다면, 이 유물 역시 현무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현무의 배 속에서 나온 그림에, 물(水)이 불(火)을 둘러싼 형태의 도안이 그려진 점도 이와 같은 견해를 뒷받침한다.

「 현무」는, 머리는 용과 같고 몸통 위에는 거북등무늬(龜甲紋)가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의궤에 기록된 현무의 형상과 같다. 현무는 네 방위 중 북쪽을 나타내는데, 북쪽은 오행 중 물(水)에 해당되며, 오행간의 상극 관계를 살펴보면 수극화(水剋火), 즉 불을 누르는 물의 관계가 이루어지므로, 「청동용머리거북」이 화기를 억누르기 위한 것임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이 「현무(청동용머리거북)」는 위 아래 두 개의 구조가 한 개의 못으로 연결된 구조인데, 이 못이 회전축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현무의 몸통 내부에서 종이에 도안이 그려진 그림 한 점이 나왔다. 

도안은 팔괘(八卦)를 기본 뼈대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 원형으로 팔괘사이에 8개, 바깥에 8개, 안쪽에 8개 등 모두 24개의 " 水"를 배열하고, 한가운데에는 " 火" 하나를 두었다.  전체적으로 물이 불을 빈틈없이 에워싼 형상인데, 이 또한 화기를 억누르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연못 속이었음에도 현무 몸통 속에 들어 있던 종이가 물에 젖지 않고 본래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잘 밀폐된 석함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유물들은, 관련 연구자의 견해로는 흥선대원군​ 때 만들어져 넣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도안은, 2012년 3월 8일 새로이 작성되어, 두 번 다시 화재로 인한 참화를 입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들의 염원을 담아, 숭례문 상량문과 함께 상량함에 넣어져, 숭례문 가운데 칸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종도리 아래 뜬창방​에 두어졌다. 지금은 화기로부터 숭례문을 지키는 수호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숭례문 앞 남지(南池) 복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작성자 분당친구>에서 발췌]

 

▼ 남지 터(南池址)에서 출토된 청동용머리거북상 안에 있던 팔괘 종이... 

 

▼ 선천팔괘를 그리고 중앙에 火를 쓴 뒤 빙둘러 水를 써서 화를 잠재우려는 비보방책이다.

 

▼ 현재의 남지 터(南池址) 표석 위치

 

▼ 남지 터(南池址) 표석... 주위에 SG타워도 생겨나고...

 

▼ 남지 터(南池址) 표석... HM빌딩 앞에 위치한다.

 

▼ 중구 서소문 일대의 표석 현황... 수시로 바뀌고 있으니 확인해 가면서 답사하세요...

 

▼ 남지 터(南池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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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