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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문 터(南小門址)는 장충단에서 국립극장을 거쳐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세워져 있던 문이다. 이 문은 서울의 숙정문, 창의문과 함께 잠깐 동안만 열려져 있다가 계속 폐쇄된 문이다.  한강진 나루로 건너온 사람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을 법한 남소문은 풍수적인 이유로 개통된지 12년만에 폐쇄되었다. 아마도 남동쪽 손방(巽方)은 바람(風)을 의미하여 국내(局內)로 바람이 유입되어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우연히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가 죽자 문을 연 것과 의경세자의 죽음이 연관이 된 것처럼 알려져 결국 문을 닫고 그 이후 여러차례 문을 열자는 의견이 개진 됐지만 끝내 열리지 않았다.

지금은 교통의 중요한 길목으로 문을 닫는 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겠지만 지금까지 그곳은 도로폭도 좁고 왠지 통행하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최근에는 남산을 오르던 길마져 자가용은 통제를 하는 실정이다보니 예나 지금이나 이곳을 통과하기는 어렵기만 하다.



▣ 남소문(南小門)


흥인지문(興仁之門 : 東大門)과 숭례문(崇禮門 : 南大門) 사이에 있는 광희문(속칭 水口門)을 남소문이라 오인한 예도 있으나 별도로 남소문이 있었다.

남소문을 설치한 것은 1457년(세조 3)이며, 새로 이 문을 설치하게 된 것은 한강 나루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그것은 거리가 멀고 불편하므로 한강 나루터를 도성에서 곧바로 통과하여 나갈 수 있는 문을 하나 새로 설치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가 있었고, 세조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새로 이 문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소문은 설치된 지 12년만인 1469년(예종 1)에 임원준(任元濬) 등의 건의에 의하여 폐지되는데, 그 이유는 실용에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음양가(陰陽家)에서 손방(巽方 : 正東南方)을 꺼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문을 설치한 뒤에 의경세자(懿敬世子 : 世祖의 世子)가 사망하여 음양가의 주장이 맞았다는 것이었다. 그 뒤 명종·숙종 때에 다시 남소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다시 제기되었으나 풍수금기설(風水禁忌說)에 의한 반대론에 부딪혀 끝내 개통을 보지 못하였다. 

1679년(숙종 5년)에는 허적이 남소문을 열어달라고 청하였으나, 노론이었던 김석주가 "남소문을 열면 남인이 성장한다"고 하여 이를 중지시켰다. 1913년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며 철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때 고개를 5m 정도 깎아서 문의 주초도 남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에서 발췌>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몇 년 전 만 해도 표석이 있는 언덕 양쪽으로 나무가 빼곡 했었는데 지금은 나무를 모두 제거한 상태다.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국립극장 방향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가는 길... 타워호텔 앞에서 국립극장 쪽으로 남산오르는 길이다.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위치... 언덕 위에 반얀트리호텔이 있다.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국립극장 가는 방향...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한남동 방향에서 국립극장 방향...


▼ 장충단 부근의 중구지역 표석


▼ 남소문 터(南小門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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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