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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퇴계 이황 집터 등은 원래 구 대법원청사 현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 위치해 있었는데 어느날 위치가 잘못 되었다고 하더니 어디론가 옮겨졌다. 그래서 아주 멀리 간줄 알고 찾지도 않았는데 우연히 서소문로 대한항공빌딩 앞을 지나다 표석이 있어 살펴보니 퇴계 이황 집터 표석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다른 표석들도 살펴보니 그 인근에 있었다.

역사학자들 입장에서 표석의 위치가 조금의 오차도 없이 제자리에 있는 게 맞겠지만 꼭 그렇게 정확성 만 찾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특히 표석이 뒷골목이나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에 세울 바에는 다소 원위치에서 조금 떨어져 있더라도 사람들이 많이 보는 곳에다 세우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표석에 이곳에서 00m 떨어진 지점에 있다고 표시하면 될 것이다.

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역시 예전 위치에서 덕수궁 정문쪽으로 직선거리 120여m 옮겨 세워져 있다. 지금은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앞 화단에 덕수궁 돌담길에 마주해서 있다보니 사람들이 훨씬 쉽게 표석을 접하고 알게 되었다. 옮긴 표석 중에 잘 된 것 중의 한 곳이라고 생각된다.


 

▣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김장생(金長生, 1548년 7월 8일 ~ 1631년 8월 3일)은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서울 출신.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다. 아들이 김집(金集)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했는데, 단양·양근 등지의 군수와 첨정(僉正)·익위(翊衛)의 관직이 거듭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해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 사업(司業)을 겸하였다. 집의(執義)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政事)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尹昉), 이조판서 이정구(李廷龜)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 호군(行護軍)의 산직(散職)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黃山書院)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行宮)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정홍명(鄭弘溟)·최명룡(崔命龍)·김경여(金慶餘)·이후원(李厚源)·조익(趙翼)·이시직(李時稷)·윤순거(尹舜擧)·이목(李楘)·윤원거(尹元擧)·최명길(崔鳴吉)·이상형(李尙馨)·송시영(宋時榮)·송국택(宋國澤)·이덕수(李德洙)·이경직(李景稷)·임의백(任義伯)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禮學)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의 일로 환천(還賤: 천인으로 되돌아감)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徐渻)·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小學集註)』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小學)』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沙溪先生全書)』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김집(金集, 1574년 음력 6월 6일 ~ 1656년 음력 윤 5월 13일) 서울 출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아버지는 김장생(金長生)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조대건(曺大乾)의 딸이다.

아버지 김장생과 함께 예학의 기본적 체계를 완비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에게 학문을 전하여 기호학파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591년(선조 24)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나, 사장학(詞章學: 시와 문장을 짓는 데 힘쓰는 학문)보다는 경전연구와 수양에 전념하였다. 1610년(광해군 2)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광해군의 정치에 반대하여 은퇴하였다.

인조반정 후 다시 등용되어 부여현감과 임피현령(臨陂縣令)을 지냈고, 그 뒤 전라도사·선공감첨정 등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직하였다. 이후 학업에 전념하여 정홍명(鄭弘溟)과 태극설(太極說)을 논하였고, 윤선거(尹宣擧) 등과는 상례에 대해 논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장생이 편찬한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전심전력하였다.

그 뒤 동부승지·우부승지·공조참판·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으나,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사임하였다. 이에 태학의 유생들이 벼슬에 오래 머물도록 해달라는 소를 올리는 등 사람들에게 그의 덕망은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1649년(효종 즉위년) 대임(大任)을 맡겨달라는 김상헌(金尙憲)의 특청을 효종이 받아들여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때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653년(효종 4) 좌참찬을 거쳐 이듬 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의 각별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묻혀 경전연구와 수양에 힘썼다.

이이(李珥)의 학문과 송익필의 예학(禮學), 그리고 아버지 김장생(金長生)의 학문을 이어받았으며, 그 학문을 송시열에게 전해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저서로는 『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이 있고, 편저로는『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1883년(고종 20)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묘와 효종묘에 배향되었다.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임피의 봉암서원(鳳巖書院), 옥천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황해도 봉산의 문정서원(文井書院),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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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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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서울시청 서소문 청사 앞 화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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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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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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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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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 서울시 의원회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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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 덕수궁 돌담길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표석을 보면서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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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 표석을 옮겨서 훨씬 많은 사람들이 표석을 인식하고 가까이에서 표석의 의미를 알게된 경우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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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

 

▼ 옛날 

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입구에 있었다.

 

▼ 서울중구 서소문 부근의 표석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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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김집선생 생가 터

 표석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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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