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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역청 터(均役廳址)는 남산스퀘어빌딩 앞 도로변 화단에 있을 때 나무로 가려져서 잘 보이지도 않아서 시정해 달라고 한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는 내용이 바뀌면서 도로변으로 내려왔는데 새로 만든 표석으로 설치하다보니 누누히 말하지만 표석으로서의 귀함이나 소중함 보다는 단순 정보전달의 기능만을 위한 그런 표식을 하나 길거리에 걸어놓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발상을 최초에 한 사람이 누군지 시간이 지나면서 표석으로서의 자부심이나 터로서의 귀함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이런 타입의 표석은 하루 빨리 수정되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예전의 그 표석을 버리지 않았다면 내용만 수정해서 다시 걸었으면 좋겠다. 사진을 찍어 크게 확대해서 조금 글씨라도 읽을 수 있지 그냥 확대 안하고 올리면 글씨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나머지 표석이라도 그대로 놔두고 내용만 바꾸기를 바란다.



▣ 균역청(均役廳)


1751년(영조 27) 균역법을 시행하면서 감필(減疋)에 따른 부족한 재정을 각 관청에 보충해주기 위해 어염세(魚鹽稅)·은여결(隱餘結)·군관포(軍官布)·결전(結錢) 등에서 재원을 마련하고, 이를 징수, 저축, 관리하며 해당 관청에 대한 급대(給代)를 총괄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균역법이 처음 논의되던 1750년(영조 26) 7월, 균역절목청(均役節目廳)이라는 권설아문(權設衙門)으로 출발해 균역구관당상(均役句管堂上) 6인만 두고 급대재정 마련을 위한 방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이것이 완전히 타결되어 균역법의 실시를 보게 된 이듬 해 9월에야 옛날의 수어청(守禦廳) 자리에 건물이 설치되고 정식 관청으로 발족되었다.

임원으로는 삼상(三相)이 으레 겸하는 도제조(都提調) 3인, 호조판서가 반드시 포함되는 제조(提調) 3인, 실직무신(實職武臣)으로 하되 그 중 1인은 비변사 낭청(郎廳)이 겸임하는 낭청 3인으로 구성하고 약간인의 서리(書吏)와 사역인을 두었다.

그러나 경비절약책으로 2년 뒤인 1753년 선혜청(宣惠廳)에 합병, 선혜청도제조·제조가 균역청 사무를 겸해 관리하게 되었다. 다만 낭청 1인을 따로 두어 실무를 맡기되 상평청(常平廳)·진휼청(賑恤廳)의 사무를 겸해 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서리 2인, 고직(庫直) 1인, 사령(使令) 4인, 문서직(文書直) 1인, 군사 4인을 배속하게 하였다.

대체로 영조 때 균역청의 1년 수입은 전으로 환산해 약 60여 만냥에 이르렀다. 이를 급대조로 지출한 것이 약 50여 만냥이어서 매년 5만∼6만냥의 여유를 가지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1756년 노비의 신공(身貢) 감축에 대한 급대를 균역청이 맡게 된 뒤, 각 관청의 사소한 비용까지 지원해주게 되어 지출이 점차 증가, 순조 때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60만냥을 넘고 있다. 이 비용은 호조의 1년 예산을 오히려 웃도는 것으로, 균역청의 재정기구적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도로변에 있는데 자세히 봐야 겨우 글씨가 보인다.


▼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남산 방향으로 바라본 모습


▼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퇴계로2가 안내표지판 밑에 있다.


▼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명동방향


▼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주면에 주자소 터 표석도 있다.


▼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남산스케어빌딩 주위의 표석


▼ 옛날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나무에 가려지기는 했어도 지금 보다는 표석의 귀중함이 느껴진다.


▼ 서울중구 퇴계로 일원의 표석 위치


▼ 균역청 터(均役廳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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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