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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시 터(軍器寺址)는 서울시청 시민청을 방문하면 그 안쪽에 군기시터 유적지가 공개되어 있다. 서울시청 신청사를 지으면서 유물이 발견되어 발굴작업 후에 유적지 위에 건물을 짓는 새로운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런데 군기시 터 표석은 시청 밖 프레스센터 앞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아마도 군기시 터가 넓다보니 시청 지하에 있는 유적지 말고도 바깥쪽에 더 넓은 지역이 해당되어 그렇게 표기한 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니라면 시청 지하에 있는 군기시 터가 있으니 바깥쪽에 있는 표석은 불필요한 표석이 되는 셈이다.

군대 병기를 만드는 곳이 시내 한 복판에 있다는 것도 요즘 논리로 보면 위험천만한 것인데 이곳에서는 화포도 만들었다. 군기시 터에서 불랑기자포(보물 861-2호)도 나왔다. 나중에 기기국으로 옮겨 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아 기기국 번사창에서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기기국 번사창은 지금의 금융연수원 안에 있다. 무기와 화약을 다루는 위험한 시설들이 외곽이 아닌 것에 조금은 의아해 진다.



▣ 군기시(軍器寺)


병조의 속아문으로서 고려시대에는 군기감(軍器監)과 군기시가 몇 번 교대로 바뀌어 불렸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2년(태조 1)에 군기감이 설치되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군기시로 개칭되었다.

관원은 병조판서나 병조참판 중에서 1인, 무장(武將) 중에서 1인을 선발하여 도제조(都提調)와 제조를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 그 밑에 정(正)·부정(副正)·첨정(僉正)·별좌(別坐)·판관(判官)·별제(別提)·주부(主簿)·직장(直長)·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참봉(參奉) 등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기술직종을 보면 여기에 딸린 공장(工匠)으로는, 칠장(漆匠) 12인, 마조장(磨造匠) 12인, 궁현장(弓弦匠) 6인, 유칠장(油漆匠) 2인, 주장(鑄匠) 20인, 생피장(生皮匠) 4인, 갑장(甲匠) 35인, 궁인(弓人) 90인, 시인(矢人) 150인, 쟁장(錚匠) 11인, 목장(木匠) 4인, 야장(冶匠) 130인, 연장(鍊匠) 160인, 아교장(阿膠匠) 2인, 고장(鼓匠) 4인, 연사장(鍊絲匠) 2인이었다.

세종 때에는 서북 변경의 개척으로 화기 사용이 빈번해지자 군기시에서의 화약기술의 확보를 위해 화약장(火藥匠)의 전지전출을 견제했고, 군기시 안에 화기를 전담하는 10여 인의 관원을 두기도 하였다. 이들은 양반 자제 중에서 기술이 정교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자를 뽑은 것으로 일명 겸군기(兼軍器)라 불렀다.

그러나 세조 이후 오랜 기간 전쟁이 없게 되자 군기시의 기능은 차츰 해이해져서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1884년(고종 21) 군기시가 폐지되자 그 직무는 기기국(機器局)으로 옮겨졌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군기시 터(軍器寺址) 표석


▼ 군기시 터(軍器寺址) 표석...서울시청 건너 한국프레스센터 길가에 있다.


▼ 군기시 터(軍器寺址) 표석... 프레스센터아케이드 입구가 보인다. 큰 건물들이 있는 곳에는 랜드마크가 잘 안보여 이런 작은 간판도 중요한 기준점이 된다.


▼ 군기시 터(軍器寺址) 표석... 세종대로 건너편에 서울시의회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은 과거 국회의사당 건물이고 부민관폭파의거터이다.


▼ 군기시 터(軍器寺址) 표석


▼ 서울중구 청계천, 을지로입구, 명동일대 주변 표석들...


▼ 군기시 터(軍器寺址)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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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