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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 25. 제 다음블로그에서 티스토리로 옮겨옵니다.>

 

우봉이씨 이유겸(李有謙) 및 이재(李縡)선생 묘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샘골)에 터를 정한 명당이다. 우봉(牛峰)이란 지명은 황해도 금천군(金川郡)의 옛 이름이다. 시조는 고려 명종 때 공신인 이공정(李公靖)이며, 우봉이씨는 학문으로 전통을 이어온 씨족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에도 사학계의 거두 이병도(李丙燾) 박사, 한시의 대가 이병주(李丙疇) 박사, 문학계의 이어령(李御寧) 박사 등이 나왔다. 
조선조에 과거 급제한 인원만 보더라도 문과 41명(갑과 3, 을과 6, 병과 34), 소과에서 진사 23명, 생원 12명, 사마 3명이 배출되었으며, 무과는 8명이다. 
특히 8세 이길배(李吉培)의 자손들이 눈부시게 번창하였는데, 14세인 만회당(晩悔堂) 이유겸(李有謙)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다.<한국자연풍수지리회>

 

이유겸(李有謙)
 
1586년(선조 19)∼1663년(현종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수익(受益), 호는 만회(晩悔). 참판 승건(承健)의 현손이며, 관찰사 신(信)의 손자이다. 조수륜(趙守倫)과 함께 성혼(成渾)의 책을 읽고, 김장생(金長生)을 사사하였다.
재능이 많고 성격은 강직하며 우애가 깊었다. 광해군 때에 조수륜이 화를 당하여 아무도 모른체하자 감히 나서서 수습하고자 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시키고자 하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직언하여 피죄(被罪)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 광해군 때에 직언으로 피죄된 사실이 인정되어 6품직인 유일(遺逸)로서 신령현감을 제수받았다. 신령현감 재임시 모략을 받자 백성들이 자진해서 포(布)를 상납하여 죄를 풀고자 할 정도로 정사를 잘 처리하였다. 그뒤 공조좌랑·함흥판관 등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에는 의병을 일으켰으나, 남한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함락되고 말았다. 말년에는 왕실의 타락을 보고 관직을 버리기도 하였다. 벼슬은 호조참의에 이르렀으며, 사후에는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재지정 용인시향토유적 제35호
문화재명칭 우봉이씨 이유겸(李有謙) 및 이재(李縡)선생 묘
소재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읍 천리 산 5
관리자(연락처) 우봉이씨

 

▼ 이유겸 묘 원경.. 아들인 우의정 이숙 묘와 함께 있다.

▼ 이유겸 묘비...

▼ 비가 내려서 깨끗하지 못하다.

▼ 이유겸 묘 근경.. 답사객이 많다.

▼ 이유겸 묘 석물

▼ 이유겸 묘 후경...

▼ 이유겸 신도비... 이유겸 묘 입구에 있는 신도비(神道碑)이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에 있다. 송시열(宋時烈)이 글을 짓고, 송준길(宋俊吉)이 글씨를 썼으며, 민유중(閔維重)이 전액(篆額)했다.

▼ 이유겸 신도비 설명

▼ 이유겸 신도비 전경

 

이숙(李숙)
 
1626년(인조 4)∼1688년(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중우(仲羽), 호는 일휴정(逸休亭). 아버지는 참의 유겸(有謙)이며, 어머니는 윤홍유(尹弘裕)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36년(인조 14)병자호란이 일어나 11세의 어린 나이로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사신으로 간 이덕인(李德仁)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1648년 진사가 되고, 1655년(효종 6)춘당대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수찬·응교 등을 거쳤다.1667년(현종 8) 집의로 있을 때 청나라 조정이 청나라 도피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조선에 책임을 물어 당시의 재상들을 벌하려고 하였다.그러나 청나라의 지탄을 받은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홍명하(洪命夏), 진주사(陳奏使) 허적(許積) 등이 그 책임을 오히려 왕에게 돌리자, 그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 맞서야 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들을 크게 꾸짖고 처벌하도록 청하였다. 그는 당시에 이들을 파직시키기를 청하였던 김징(金澄) 등 7인과 함께 8간신(諫臣)으로 불렸다. 1669년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1672년 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1675년(숙종 1)서인이 실각하자 한때 물러났으나 뒤에 재등용되어 이조판서를 지냈으며, 1687년 우의정에 올랐다. 대구의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헌(忠獻)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숙 묘는 이유겸 묘 아래에 있다. 

▼ 이숙 묘비

▼ 이숙 묘 석물

▼ 이숙 묘 석물

▼ 이숙 묘비

▼ 이숙 묘 후경

 

▼ 이재 묘로 가는 중간에 정경부인 묘가 있는데 누구의 묘인지는 알수없다.

 

이만창(李晩昌)
 
숙종(肅宗) 1년(1675) 을묘(乙卯) 증광시(增廣試) 진사 2등(二等)으로 합격. 부친은 우의정 이숙(李䎘)이며 동생은 이조판서 이만성(李晩成), 사간원대사간 이만견(李晩堅)이다.

 

▼ 이숙의 장남 이만창 묘

▼ 이만창의 묘비

▼ 이만창 묘의 석물

▼ 이만창 묘 석물

▼ 이만창 묘 후경...

▼ 이만창 묘 후경.. 청룡이 앞을 막고있다.

▼ 이만창 묘 후경,,, 청룡과 백호가 관쇄되어있다..

▼ 이만창 묘의 입수맥..

 

이재(李縡)
 
1680년(숙종 6)∼1746년(영조 2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진사 만창(晩昌)의 아들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1702년(숙종 28)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가주서·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이 되어 《단종실록》 부록 편찬에 참여하였다.1704년 설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사서가 되어 1707년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였다.이듬해 문학·정언·병조정랑을 거쳐, 홍문관부교리에 임명되었다.1709년 헌납·이조좌랑·북평사를 거쳐 사가독서하였고, 1711년 이조정랑으로 승진, 이어 홍문관의 수찬·부교리·응교·필선·보덕 등을 지내고 집의로 옮겼다.1712년 장악원정·수원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1713년에 형조참의·대사성, 1715년에 병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다음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어 호조참의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는데, 이때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싼 시비가 일어나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719년 형조참판·승문원제조·부교리 등을 거쳐 경상도에 균전사(均田使)로 파견된 뒤 당면한 토지정책을 논하다가 파직되었으며 이듬해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다.1721년(경종 1) 대사헌·동지춘추관사를 겸하였다가 실록청당상에 임명되었고, 이조참판에 제수되면서 실록청도청당상으로 승진하였다. 같은해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으나 소론의 집권으로 삭직되었다.1722년 임인옥사 때 중부 만성(晩成)이 옥사하자 은퇴하고, 인제에 들어가서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1725년(영조 1) 영조가 즉위한 뒤 부제학에 복직하여 대제학·이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대제학에 재임되었으나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성립되자 문외출송(門外黜送)된 바 있으며, 이후 용인의 한천(寒泉)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1740년 공조판서, 1741년 좌참찬 겸 예문관제학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였다. 의리론(義理論)을 들어 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가운데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윤봉구(尹鳳九)·송명흠(宋命欽)·김양행(金亮行) 등과 함께 당시의 정국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당시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낙론의 입장에 섰다.예학(禮學)에도 밝아서 많은 저술을 편찬하였다. 용인의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다.저서로는 《도암집 陶菴集》·《도암과시 陶글科詩》·《사례편람 四禮便覽》·《어류초절(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재선생의 묘역 안내판

▼ 이재선생 묘 전경

▼ 이재선생 묘비

▼ 이재선생 묘 석물..

▼ 이재선생 묘 석물들..

▼ 이재선생 묘 석물.. 청룡쪽..

▼ 이재선생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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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