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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

 

최명길 묘를 보고 바로 백호자락에 있는 최석정 묘를 답사했는데... 최석정 묘에는 묘비가 없다. 후손들이 세워놓은 안내비석이 없다면 누구의 묘인지도 모를 뻔했다. 그 아래에 있는 최석정의 아들 최창대 묘 역시 묘비를 세우지 않아서 부친 묘처럼 후손들이 묘비 안내석을 세워 놓았다.

최석정 묘 위에는 최석정의 10대조인 완산군 최재 묘가 있는데... 어떤 연유로 10대조 묘 아래에 최명길, 최석정 묘가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맑은 날 찾았는데 4월의 신록이 진하게 되는 무렵이어서 나무도 푸르고 주변에 야생화도 많아서 답사하기에는 아주 좋은 때였다. 사실 4월만 지나면 묘지 답사하기에는 조금 무리다. 주변이 전혀 안보이고 묘역에 풀이 무성해지기 시작해서 사진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요즘도 6월까지는 열심히 묘지 답사를 다니고 있다. 시간도 아쉽고 무엇보다 어디를 찾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듯 답답해서 나가기를 즐기고 있다.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석만(錫萬). 자는 여시(汝時)·여화(汝和), 호는 존와(存窩)·명곡(明谷). 최기남(崔起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최명길(崔鳴吉)이고, 아버지는 한성좌윤 완릉군(完陵君)최후량(崔後亮)이다. 어머니는 안헌징(安獻徵)의 딸이다. 응교 최후상(崔後尙)에게 입양되었다.
9세에 이미 『시경』과 『서경』을 암송했고, 12세에 『주역』을 도해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러 신동으로 인정받았다. 남구만(南九萬)·이경억(李慶億)의 문인이고, 박세채(朴世采)와 종유(從遊)하면서 학문을 닦았다. 17세에 감시(監試) 초시에 장원을 했고,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장원했으며 동시에 생원시도 합격하였다.
1671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림회천(翰林會薦)에 뽑혀 사관으로서 활동하다가 홍문록에 올라 홍문관원이 되었고,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아 호피(虎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 동안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을 비판한 오도일(吳道一)을 변호하다가 삭직되기도 하였다. 또한 1676년(숙종 2)의 응지소에서는 윤휴(尹鑴)를 비난하고 김수항(金壽恒)을 옹호하다가 삭출되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 이후 병조정랑·승정원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양부모의 상을 당해 일단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 후 1689년 기사환국까지 승정원승지·성균관대사성·홍문관부제학과 제학을 역임하였다. 1686년에는 조선인이 청나라의 국경을 넘어들어간 사건이 국제 문제로 비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호조참판으로서 부연(赴燕)하기도 하였다.
1685년에는 사학 유학생들이 이른바 『명재의서(明齋疑書)』가 이이(李珥)를 모함하여 욕했다고 비난하자 윤선거(尹宣擧)의 강도(江都) 사건이나 이이의 입산(入山)한 잘못은 똑같은 문제라고 지적하였다. 2년 후 노소분당이 심각해지자 윤선거를 옹호한 나양좌(羅良佐)의 견해를 지지함으로써 노론세력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장희빈(張禧嬪)에 대한 총애 문제를 들추어낸 이세구(李世龜)를 옹호하고 청류(淸流)로 지칭되는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선비들을 힘써 선발하려고 노력하였다. 기사환국 이후에는 주로 외직에 있으면서 안동부사·연안부사를 역임하다가 부친상을 당해 물러났다.
1694년 갑술환국 이후 한성판윤·사헌부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장희재(張禧載)를 사형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홍문관대제학·이조판서에 임명된 뒤에는 서얼 출신을 삼조(三曹)에 소통하자는 건의를 올리기도 하였다. 1697년 우의정에 올랐고, 왕세자 책봉을 위한 주청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붕당의 폐단을 논하면서 남인들의 일부 서용을 주장하는 입장을 개진, 노론세력의 강한 반발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단종 복위를 성사시키기도 하였다. 1699년 좌의정을 거쳐 1701년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묘배향 논의가 일어나자 가볍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라고 반대하였다.
이 해 8월에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고 장희빈에 의한 무고(巫蠱)의 변이 일어나자 왕세자 보호를 위해서는 생모인 장희빈을 사사(賜死)해서는 안 된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또한 붕당 문제보다 도학(道學)이 쇠퇴한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이유로 파직, 유배의 명령이 내려졌다가 다음 해 석방되어 진천에 거주하였다.
이듬해 다시 영의정이 되었는데 1710년까지 모두 열 차례 입상(入相)하였다. 이 후 노론세력이 대보단(大報壇)을 세우면서 의리론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을 공격하자 이를 변호하였다.
또 임보(林溥)·이잠(李潛)의 옥사에서는 왕세자의 처지에 문제되지 않도록 안옥(按獄)하여 노론의 비난을 샀으며, 여기에 민암(閔黯)의 아들까지 사형에 처한 것은 비법적 처사라고 비난했던 사실까지 들추어지고, 그의 저서 『예기유편(禮記類篇)』가 주자의 주와 다르다며 비판받는 등 노론의 집중 공격을 받자 1711년 이후 미사(渼沙)에 은퇴하였다.
1715년 기사(耆社: 기로소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고, 이 해 사망하였다. 청주 대율리(大栗里)에 장례지냈으며, 뒤에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성격이 겉으로는 화평하나 안으로는 굳건했으며 염려나 불만의 기색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직업 관료의 성격이 강해 의리·명분론에 집착하지 않고 백성의 어려움과 정치적 폐단을 변통하려 했던 행정가였다. 또한 당쟁의 화를 가능한 한 줄이려고 힘썼던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야승(野乘)』을 집대성하려고 노력하여 찬수청을 설치하게 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편저에 『전록통고(典錄通考)』가 있고, 저서로 『예기유편』과 『명곡집(明谷集)』 36권이 현재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주 최석정 묘소(淸州 崔錫鼎 墓所) : 충청북도기념물 제169호
 
청주 최석정 묘소(淸州 崔錫鼎 墓所)는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에 있는, 조선 숙종대 영의정을 지낸 문신인 최석정의 무덤이다. 2019년 6월 7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169호로 지정되었다.
최석정(1646~1715)은 병자호란 시기의 대문신인 최명길(崔鳴吉)의 손자로 온건하고 타협적이고 개방적인 정치·사상을 가졌으며, 조선 숙종대 영의정을 지낸 문신이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양명학·음운학·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최석정은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에 머무르다가 전주최씨 터전인 청주 대율리의 최명길 묘소와 떨어진 서쪽 구릉에 묻혔다. 묘소는 둘레돌(護石)을 두르고 흙으로 쌓은 무덤으로 1716년에 만들어졌으며, 석물은 1740년 전후에 설치한 것으로 전해져 온다.<충청북도기념물>

 

문화재지정 충청북도기념물 제169호
문화재명칭 청주 최석정 묘소(淸州 崔錫鼎 墓所)
소재지 충청북도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237-15
관리자(연락처) 전주최씨명곡종파종중

 

▼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 용맥도

▼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 전경

▼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 안내문

▼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비... 최석정이 묘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묘비가 없다고 한다. 최석정은 수학에 아주 뛰어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1710년 영의정을 그만둔 이후 1710년~1715년에 《구수략》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여기에는 기존에 전해진 수학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내용과 전혀 새로운 독창적 내용이 함께 수록되어있다. 특히 《구수략》의 마지막 권에는 마방진, 직교 라틴 방진, 그리고 지수귀문도등 사각형이나 육각형 모양의 수의 구성도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최석정의 탁월한 수학적 직관력과 수학 이론의 독창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최석정은 국립과천과학관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위키백과>

▼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 뒤쪽으로 10대조 최재 묘가 보인다.

▼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 석물

▼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 후경... 보라색 꽃이 인상적이다.

▼ 영의정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묘 동영상

 

문정공(文貞公) 최재(崔宰)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재지(宰之). 선부전서(選部典書) 최득평(崔得枰)의 아들이다.
1321년(충숙왕 8) 동대비원녹사(東大悲院錄事)로 출발, 산원(散員)·별장(別將)을 거쳐 1330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민왕 즉위 후 개성소윤(開城少尹)·전법총랑(典法摠郎)·감찰집의(監察執義)·상서우승(尙書右丞)·대부시사(大府寺事) 등의 관직을 차례로 역임하면서 왕으로부터 직접 칭찬을 받을 만큼 많은 치적을 올렸다. 1359년(공민왕 8) 다시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출보되었으며, 1361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옮겼다.

1364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기용되고, 중대광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해졌다.
그 뒤 전리판서(典理判書)와 개성윤(開城尹)을 역임했으며, 1374년 벼슬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우왕 때 밀직부사 상의(密直副使商議)를 제수했으나 사양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사람들이 중히 여겼다고 한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효백(孝伯), 호는 곤륜(昆侖). 영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증손으로,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로 이경억(李慶億)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생원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6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설서·부수찬을 거쳐 1698년 암행어사가 되었다. 이어 교리·이조좌랑·헌납·응교를 거쳐 1704년 사서(司書)·이조정랑을 지냈고, 1706년 사간 등을 지낸 뒤 1711년 대사성에 승진하였으며, 그 뒤 이조참의·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박세채(朴世采)·김창협(金昌協)에 비교되었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경서에 밝아 당시 사림에게 추앙을 받았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암행어사로 있을 때 함경도 일대의 관폐를 엄명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전라도에 어사로 나가서는 진소어(眞蘇魚)의 수세(收稅)에 따른 폐단과 각 고을 승려에게 부과하는 지공(紙貢)에 따른 폐단, 연해 제읍(諸邑)의 수령을 무신만으로 임명하는 데 따른 문제점 등에 대한 서계(書啓)를 올렸다. 저술도 많이 있으나 대부분 산일(散佚)되고, 『곤륜집(昆侖集)』 20권 10책 만이 전하여지고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최석정(崔錫鼎)의 10대조 최재 묘 전경

▼ 최석정(崔錫鼎)의 10대조 최재 묘... 일부에서 문진공(文眞公)으로 나오는데 묘비에는 문정공(文貞公)으로 되어 있다.

▼ 최석정(崔錫鼎), 10대조 최재 묘 후경

▼ 최석정(崔錫鼎)의 아들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 묘

▼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 묘

▼ 최석정(崔錫鼎)의 아들 곤륜(昆侖) 최창대(崔昌大) 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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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