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묘

 

코로나가 한창일 때 청주지역 묘지답사를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최명길, 최석정 묘를 답사했다. 여러번 기회가 있었는데 찾지 못하다가 찾았는데 답사기를 이제서야 올리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일상이 무너져 여러가지로 힘든 시기였지만 답사하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라는 표현처럼 코로나 덕분에 여러지역 묘들을 답사할 수 있었다. 이러니 한가지로 단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다.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다.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1605년(선조 38) 생원시에서 장원하고, 그 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국내 정치문제와 관련한 조선인의 명나라 사신 일행과의 접촉 금지를 둘러싼 말썽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 간 복상(服喪)한 뒤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는데, 이 무렵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광해군의 난정이 극심할 때였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다. 그 뒤 홍문관부제학·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江華)의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강화 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때문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또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뒤에 元宗으로 추존) 합부(合祔: 신주를 한 사당에 모셔 놓고 한 곳에서 제사지냄)에 따른 문제로 옥당(玉堂)의 배척을 받았으나 인조의 배려로 외직인 경기관찰사로 나갔다. 다시 우참찬·부제학·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부터는 이조판서에 양관(兩館: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이 무렵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절화(絶和: 화의를 단절함)의 의논이 높아졌는데 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응하여 몇 년 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종막(終幕)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 원망을 불러일으켜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1635년 초 이조판서직을 면하고 몇 달 뒤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으나, 난전(亂前)에 이미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강화론을 계속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제대로 조처하지 못한 채 일조에 적의 침입을 받으면 강도(江都)와 정방산성(正方山城)을 지키는 것으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여 강력히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 해 겨울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는데, 12월 청군(淸軍)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주전론 일색 가운데 계속 주화론으로 일관하였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 해 정월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이 때 진행 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며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시국에 대한 각기의 견해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청군이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에 국내가 점점 안정되었으며, 가을에 좌의정이 되고 다음 해 영의정에 올랐는데, 그 사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세폐(歲幣: 매년 공물로서 바치는 폐물)를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막았다. 1640년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 때 임경업(林慶業) 등이 명나라와의 내통하고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청나라에 알려져 다시 청나라에 불려가 김상헌 등과 함께 갇혀 수상으로서의 책임을 스스로 당하였다. 이후 1645년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陽明學)을 독수(獨修: 혼자서 은밀히 공부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교우 장유나, 계자(系子) 후량(後亮) 및 손자 석정(錫鼎) 등의 경우에도 양명학을 공부하여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한다. 저서로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책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주 최명길 묘소(淸州 崔鳴吉 墓所) : 충북 기념물 제 68 호

 
조선 중기 문신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묘소이다.
최명길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05년(선조 38)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614년(광해군 6) 폐모(廢母)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며, 그 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講和)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斥和論)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주화론(主和論)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 해 정월 인조가 직접 나가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 데 힘을 쏟았다. 1640년(인조 18) 사임했다가 1642년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조선의 반청(反淸)적인 움직임이 알려져 청나라에 불려가 있다가 1645년(인조 23)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저서로 『지천집(遲川集)』과 『지천주차(遲川奏箚)』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최명길의 묘역 안에는 3기의 봉분이 있는데 이 중, 중앙에 위치해 있는 것이 최명길의 묘소이다. 봉분 주위에 높이 20〜50㎝의 화강암으로 된 호석(護石)을 둘렀고, 묘 앞에 상석(床石)과 묘표(墓表)가 있다. 상석의 규모는 170×96×29㎝이며, 묘표의 규모는 54×134×15㎝이다. 묘표는 남구만(南九萬)이 글씨를 썼다. 상석 앞에 배열된 망주석과 문인석은 화강석으로 높이 160㎝ 정도이며 약간 마모되었다.
묘 앞 500m 지점에는 숙종 때 세운 최명길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의 규모는 비신 106×268×36㎝이고 전체높이 4m의 대형비석이다. 최명길 신도비는 묘소와는 별도로 1980년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1978년에 보호각을 세웠다.<충북문화유산디지컬아카이브>

 

문화재지정 묘:충북기념물 제68호, 신도비:충북유형문화재 제59호
문화재명칭 최명길(崔鳴吉) 묘 및 신도비
소재지 충북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대율리 253-3
관리자(연락처) 전주최씨 문열공파 종중

 

청주 최명길 신도비(淸州 崔鳴吉 神道碑) : 충북유형문화재 제59호
 
청주 최명길 신도비는 조선 중기의 명신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 1586〜1647)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석이다.
신도비란 죽은 사람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석으로, 최명길 신도비는 1702년(숙종 28)에 건립되었다.
최명길은 본관이 전주(全州)이고,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창랑(滄浪)이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05년(선조 38)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614년(광해군 6) 폐모(廢母)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되었으며, 그 뒤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청나라와의 강화(講和)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일찍부터 척화론(斥和論)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주화론(主和論)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청나라 군대가 물러간 뒤, 그는 우의정으로서 흩어진 정사를 수습하는데 힘을 쏟았다. 1640년(인조 18) 사임했다가 1642년(인조 20) 가을에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이후 조선의 반청적(反淸的)인 움직임이 알려져 청나라에 불려가 있다가 1645년(인조 23)에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보필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저서로 『지천집(遲川集)』과 『지천주차(遲川奏箚)』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최명길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 있는데, 비신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을 얹은 형식으로, 비신의 규모는 비신 106×268×36㎝이고 전체높이 4m의 대형비석이다. 1978년 비의 보호를 위해 보호각을 세웠으나, 이미 풍화되어 비문을 거의 판독할 수 없는 상태이다. 비문은 홍문관대제학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글씨는 증손인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최창대(崔昌大)가 쓰고,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두전[頭篆, 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가며 쓴 글씨]을 썼다. 비문은 『청원군지-하』(2006)에 실려 있다.
최명길 신도비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와의 평화 관계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홀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和議) 교섭을 성사시키는 등 현실적 외교정책을 주장한 최명길의 면모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어 조선 후기 대외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충북문화유산디지컬아카이브>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묘역 용맥도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신도비... 뒤로 묘소가 보인다.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신도비 안내문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신도비 전액...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신도비 비신... 글자가 잘 안보인다.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최명길(崔鳴吉) 묘 원경

▼ 최명길(崔鳴吉) 묘 안내문

▼ 최명길(崔鳴吉) 묘

▼ 최명길(崔鳴吉) 묘... 품(品)자 형태인데... 가운데가 최명길 묘...

▼ 최명길(崔鳴吉) 묘표...朝鮮上國이라는 말은 처음 본다.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 상국(朝鮮相國) 증시 문충 지천 최공 명길지묘'. '조선의 정승, 문충공 최명길의 묘'라는 뜻이다. 비석 뒤에는 '세(歲) 임오년 5월'이라고 새겨져 있다. 1702년에 건립했다는 뜻이다.<박종인의 땅의 역사> 아마도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한 주화파의 한사람으로서 그 당시 유행한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는 말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국(相國)은 중국의 명나라를 지칭하는 것인데 <박종인의 땅의역사>에서는 이를 그냥 조선의 정승으로 해석했다. 뭔가 조금은 헷갈린다.

▼ 최명길(崔鳴吉) 묘 석물

▼ 최명길(崔鳴吉) 묘 측경

▼ 최명길(崔鳴吉) 묘 후경... 백호 본신 안산으로 잘 갖춰져 있지만 조금만 높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 최명길(崔鳴吉) 묘 후경

▼ 최명길(崔鳴吉) 묘 동영상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