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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또 다른 블로그 '좋은터 길라잡이'에 2012. 3. 23 올린 글을 최명길 글을 쓰면서 참고하기 위해 티스토리로 옮겨왔습니다.


 

최기남(崔起南) 묘(영의정 최명길 父)

 

영의정 최명길 부친 묘가 성남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주소를 확인하여 아무리 찾아봐도 인근에는 묘가 안보인다. 그래서 항공사진을 뒤지면서 대략적인 위치로 나오는 곳을 확인해보니 그곳에 묘 하나가 보인다. 확인해 봤더니 성남시 문화원에 나오는 묘지 주소가 잘못되어 답사객 생고생을 시킨 것이다. 주소를 수정했으니 다음 답사객은 편하게 잘 다녀오시길...
이곳은 마음만 앞서 아침 7시에 출발하여 첫번째 답사지로 찾은 곳이다. 아직 안개가 겉히기도 전이라 후경으로 찍은 사진이 몽환적으로 비춰진다. 이날 힘이들어 오후에 일찍 답사를 마쳤다.

 

최기남(崔起南)
 
1559년(명종 14)∼1619년(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숙(與叔), 호는 만곡(晩谷)‧만옹(晩翁)‧양암(養庵). 아버지는 증좌승지 최수준(崔秀俊)이며, 어머니는 증호조참의 남상질(南尙質)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학문과 재행이 뛰어났으며,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태학에 입학하였다. 당시 호남 선비들이 올린 언사(言事)가 선조의 비위에 거슬려 그들이 하옥되자 태학생들이 상소할 때 소두(疏頭)가 되어 구원하였다.
1600년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어 왕세자의 학문을 잘 이끌었다.
1602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병조좌랑‧지제교(知製敎)‧시강원사서와 형조‧예조‧병조의 정랑을 두루 역임하고, 1605년 함경북도평사로 나갔다.
이듬해 내직에 들어와 예조‧병조의 정랑과 세자시강원시강 등을 역임하고, 1612년(광해군 4)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계되어 영흥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다.
이때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에 의하여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하는 옥사가 일어났는데, 그에 연루되어 삭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가평에 은거하여 만곡정사(晩谷精舍)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선조 때는 군정(軍政)에 관한 많은 상소를 올려 정치를 보좌하였고, 광해군 초기 홍문관에 있을 때에는 군국대무(軍國大務)에 대한 6조의 소를 올리는 등 여러 차례 시정혁폐(時政革弊)를 직언하였다. 뒤에 아들 최명길(崔鳴吉)의 인조반정 공훈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최기남(崔起南) 묘(영의정 최명길 父)
소재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오야동 산3-1
관리자(연락처) 전주최씨 종중

 

최기남(崔起南)
 
최기남(1559∼1619)은 문신. 본관은 全州(전주). 자는 與叔(여숙). 호는 晩谷·晩翁·養庵(만곡·만옹·양암) . 秀俊(수준) 의 자. 영의정 鳴吉(명길)의 父(부). 牛溪 成渾(우계 성혼) 의 문인.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호남의 선비들이 왕의 뜻에 거슬러 하옥되자 疏頭(소두)가 되어 수차례의 상소로 이들을 석방시켰다. 1591년(선조 24) 鄭澈(정철)의 建儲問題(건저문제)로 서인이 실각당할 때 이에 연좌되어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잃었다가 1600년(선조 33)에 비로소 王子師傅(왕자사부)가 되었다.
1602년 알성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보임받았다가 병조좌랑에 올라 지제교에 선발되었다. 이후 시강원사서, 문학, 형조·예조·병조정랑을 역임하고 1605년(선조 38) 時事(시사)에 연루되어 咸鏡道北評事(함경도북평사) 에 좌천되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여서는 사헌부장령·홍문관수찬 교리를 거쳐 황해도 암행어사·永興府使(영흥부사)를 지냈으나, 1613년(광해군 5) 李爾瞻(이이첨)으로 인한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삭직되자 향리에 은둔하였다. 후에 아들 명길의 勳功(훈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묘역은 신촌동 오야리 마을 앞을 지나는 23번 도로와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에 東南向(동남향)하여 있다. 配貞敬夫人全州柳氏(배정경부인전주유씨) 와의 합장묘인 원형의 봉분은 용미를 갖추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90㎝, 직경 550㎝이다. 묘역에는 봉분 중앙에 묘표·상석·4각 향로석·동자석·장명등과 상석 좌우로 8각 망주석·금관조복형의 문인석 등 다수의 옛 석물을 갖추고 있다. 상석은 백색화강암제로 크기는 높이 23㎝·너비 137㎝·두께 89㎝이다. 향로석은 높이 32㎝·너비 27㎝이다. 동자석은 소발에 양 손이 파손되어 있는데, 우측의 동자석은 목부분이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크기는 좌우 57㎝ 가량의 소형이다. 망주석은 좌가 높이 140㎝, 우가 높이 136㎝로 좌측의 망주석은 간주석이 파손되어 두 군데에 걸쳐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문인석은 신체에 비례하여 얼굴이 갸름한데 크기는 좌가 높이 134㎝, 얼굴부분 45㎝, 우가 높이 150㎝, 얼굴부분 44㎝이다. 장명등은 화창이 없으며 높이 176㎝에 지붕높이가 74㎝이며, 한 면의 직경은 76㎝, 처마면은 15㎝로 두껍다.
봉분 중앙의 墓表(묘표)는 비좌와 一石(일석)의 비신 및 前後 日月紋(전후일월문)의 관석을 갖추고 있다. 비좌는 백색화강암제로 마모가 심한 편이다. 비신은 백색대리석제로 표면이 결락된 상태이다. 비문은 前後 2面(전후 2면)에 있으며, 前面(전면)에 종2열로 ‘贈領議政完興府院君崔公起南之墓 贈貞敬夫人全州柳氏?(증영의정완흥부원군최공기남지묘 증정경부인전주유씨부) ’의 비문이 있다. 후면에는 공의 약력을 간략히 기록하였으며, 건립연대는 丙戌(병술)(1646) 8月(월)29日(일)이다. 옥개석은 前面(전면)에 태양을 상징하는 직경 17㎝의 원문이 있고, 後面(후면)에는 달을 상징하는 직경 26㎝의 반원문이 양각되어 있다. 이렇듯 성남 지역에서 각종 묘비의 옥개석에 日月紋(일월문)이 새겨지는 경우는 드문 예로서 고등동 李  (이함)(1470∼1534)神道碑(신도비)와 李景閔 墓碣(이경민 묘갈) ,율동 韓士介(한사개)(1453∼1521)神道碑(신도비)등에서 소수 확인된다. 크기는 비좌 높이 30㎝·너비 93㎝·두께 58㎝, 비신 높이 89㎝·너비 52.5㎝·두께 18㎝, 관석 높이 40㎝·너비 58㎝·두께 25㎝이며 總高(총고)159㎝이다.
神道碑(신도비)는 묘역 하단 밭 가운데에 東南向(동남향)하여 백색화강암제의 비좌와 一石(일석)의 비신 및 이수를 갖추고 있다. 비좌는 대부분 땅속에 묻혀 있고 상부가 일부 노출되어 있는데, 상부에 복련문을 조식하였다. 비신은 백색대리석제이나 표면이 심하게 결락되어 있어 판독가능한 글자는 거의 없다. 현 상태로 보아 비문은 前後 2面(전후 2면)에 있으며, 비신 前面(전면)상부에 篆書(전서)로 ‘贈領議政崔公神道碑銘(증영의정최공신도비명) ’이라 하였다.
비문은 溪谷 張維(계곡 장유) (1587∼1638)가 찬하고 雪峰 金義信(설봉 김의신) 이 서하였으며, 건립연도는 1650년(효종 1)이다. 이수는 발가락이 3개인 雙龍(쌍용)이 좌우 입을 벌린 채 앞발을 치켜들어 여의주를 서로 움켜잡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후면도 같은 형태이다. 몸통의 비늘과 괴수·뿔 등의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다.
크기는 비좌 높이 12㎝·너비 136㎝·두께 80㎝, 비신 높이 165㎝·너비 87㎝·두께 32㎝, 이수 높이 66㎝·너비 96㎝·두께 42㎝이며 總高(총고)183㎝이다.<성남시 문화관광사이트>

▼ 최기남(崔起南) 신도비...묘역 입구에 있다.

최기남(崔起南) 신도비 이수

최기남(崔起南) 묘 입구...

최기남(崔起南) 묘.. 아침 햇살을 받아 색다른 분위기를 만든다..

최기남(崔起南) 묘 장명등

▼ 최기남 묘 석물... 망주석이 부러져 있다..

▼ 최기남 묘 석물.. 동자석도 새로 세워져 있다..

▼ 최기남 묘 전경.. 봉분이 낮게 되어있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 최기남 묘.. 나즈막한 야산의 산진처에 위치해 있다.

최기남(崔起南) 묘표..

▼ 최기남 묘 입수도두...

▼ 최기남 묘의 청룡... 예전에는 더 내려가 묘역을 감싸줬겠지만 지금은 잘려 주택들이 들어서있다.

▼ 최기남 묘 백호... 그런대로 원상을 간직하고 있다.

▼ 최기남 묘 후경... 앞쪽 성남비행장에 안개가 자욱하다. 명당이 평탄하고 원만하다..

최기남(崔起南) 묘 후경... 앞쪽에 안개가 끼어 넓은 호수를 연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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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