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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사찰 청계사(淸溪寺)

판교, 의왕지역 답사를 진행하며 다녀온 곳이다. 청계산을 올랐을 때 청계사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등산 동선이 반대방향으로 되어 찾지 못하고 판교쪽으로 내려왔었다. 가야할 곳을 못간 곳은 항상 기록해 두었다가 인근에 볼 일이 있다던가 근처를 방문할 때 시간 내서 찾는다. 이곳도 한국학중앙연구소를 찾을 때 함께 한 곳이다.

청계산은 고려 때 조인규가 사재를 투입하여 중창한 뒤 그의 원찰로 삼아 크게 확장하였는데 다른 사찰들이 그러하듯 크고 작은 화재로 절이 파괴 되어 다시 중건하기를 반복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명맥만 유지되고 현대에 들어와서 불사를 크게 하여 많은 신도들이 찾고 있다. 이곳에는 사인 비구가 제작한 동종이 남아있다.

 

 

청계사(淸溪寺)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대찰의 모습을 갖춘 것은 1284년(충렬왕 10) 시중 조인규(趙仁規)가 막대한 사재를 투입하여 중창하고 그의 원찰로 삼은 뒤부터이다. 그때부터 이 절에는 100명이 넘는 수도승이 상주하였다. 자손들이 여기에 그의 사당을 짓고, 전장과 노비를 두어 대대로 제사를 지냈다.
1407년(태종 7) 조정에서는 이 절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하고 천태종에 소속시켰으며, 1431년(세종 13) 조인규 영당을 중건하였고, 연산군이 도성 내의 사찰에 대한 폐쇄령을 내렸을 때 이 절은 봉은사(奉恩寺)를 대신하여 선종본찰(禪宗本刹)의 기능을 행하는 정법호지도량(正法護持道場)이 되었다. 광해군 때는 이 절의 소속 전장과 노비를 모두 관에 소속시켰고, 1689년(숙종 15) 3월 화재로 모든 건물이 불탔을 때 성희(性熙)가 중건하였다. 1761년(영조 37) 정조가 동궁으로 있을 때 이 절에 원당을 설치한 뒤 밤나무 3,000주를 심고 원감(園監)을 두었으며, 1798년(정조 22) 조무의(趙武毅)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1876년(고종 13) 3월 26일 실화로 수십 칸의 건물이 소실되자 4년 후인 1879년에 음곡(陰谷)이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종교 탄압정책으로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여 이어 오다가 1955년 비구니 아연(娥演)이 주지로 취임한 뒤 중창을 시작하였고, 월덕(月德)·탄성(呑星)·월탄(月誕) 등이 그 뜻을 이어 당우를 회복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삼성각(三聖閣)·산신각·종각·수각(水閣)·봉향각(奉香閣)·대방(大房)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양식으로 처마는 이중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사인비구(思印比丘)가 제작한 동종이 보물 제11-7호로 지정되었으며, 청계사 소장 목판이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신중도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절 입구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88호 청계사사적기비(淸溪寺事蹟記碑)와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6호 청계사조정숙공사당기비(淸溪寺趙貞肅公祠堂記碑)가 있고, 사찰 주위의 계곡이 좋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지정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호
문화재명칭 청계사(淸溪寺)
소재지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산11
관리자(연락처) 대한불교조계종 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

 

의왕 청계사 조정숙공사당기비(義王 淸溪寺 趙貞肅公祠堂記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76호
 
이 비(碑)는 고려시대 1341년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12번지 청계사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 사당을 만들게 된 과정을 일정한 형식에 맞추어 이은 글을 사당기(祠堂記)라고 하며, 이를 비석에 새긴 것을 사당기비(祠堂記碑)라고 한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 177cm, 너비 48cm, 두께 18cm로 찬자(撰者)는 이곡, 글씨는 왕수성이 썼다. 전체적으로 앞면과 뒷면 모두 마모가 심하여 글씨를 모두 알아보기 힘들지만 뒷면에 새겨진 글자의 일부가 선명하게 남아있어 내용의 일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비석의 앞면에 비명인 조정숙공사당기비(趙貞肅公祠堂記碑)가 새겨져있고 비문과 같은 내용이 이 비석의 찬자(撰者)인 이곡의 문집 가정집(稼亭集)에도 실려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찬자인 이곡이 어떻게 비명과 비문을 짓게 되었는가로 이야기가 시작되어 조인규의 일대기를 적어 놓았고 마지막 부분에 청계사를 짓게 된 경위를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이 비문은 조인규와 충렬왕의 관계를 비롯하여 당시 고려와 원나라와의 대외관계, 청계사의 창건이유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위키백과>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진(去塵). 원(元)나라의 간섭기 때 어린 자제들 중 똑똑한 자를 골라서 몽골어를 배우게 했는데, 여기에 선발되었다. 3년 동안 몽골어를 공부하여 제교(諸校)로 임명되었다. 세자 심(諶 : 뒤의 충렬왕)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수행했고, 세자와 혼인한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의 사속인(私屬人)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 세력을 배경으로 여러 벼슬을 거쳐 1275년(충렬왕 1)에 장군이 되었다. 1278년 대장군으로 경상도에 파견되어 유랑하는 백성들을 모아 호적에 등록했으며, 이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280년에는 우승지에 임명되었다. 몽골어와 한어에 능통하여 원에서 보내오는 조서와 칙서를 번역한 공을 인정받아 원나라에서 금패를 받고, 선무장군 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宣撫將軍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일본정벌 때 원나라에 고려의 일을 잘 보고한 공으로 토지와 노비를 받고 그 자손들은 관직에 임명되었다. 1290년에 원나라가 동녕부를 폐지하여 고려가 서북의 여러 성을 돌려받는 데 공을 세웠다. 1292년 딸이 세자비가 되었으며, 중찬(中贊)을 거쳐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가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의 비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가 조비(趙妃)를 무고하여 충선왕이 퇴위하게 되자 그도 재산을 몰수당한 후 곤장을 맞고 원의 안서(安西)로 유배되었다(→ 조비무고사건). 1305년 석방되어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임명되었으며, 1307년에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고 난 뒤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咨議都僉議司事平壤君)에 봉해지고 선충익대공신(宣忠翊戴功臣)의 칭호를 받았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다음백과>

 

▼ 우담바라 핀 청계사(淸溪寺)... 

▼ 청계사(淸溪寺) 입구 비석군... 

▼ 청계사(淸溪寺) 사적기비와 조정숙공사당기비

▼ 청계사(淸溪寺) 안내문

▼ 청계사(淸溪寺)는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 청계사(淸溪寺)에는 초파일도 아닌데 연등이 가득하다. 

▼ 청계사(淸溪寺)는 1년 내내 연등을 달아놓는 모양이다.

▼ 청계사(淸溪寺)에 초하나 켜고 가족건강을 기원했다.

▼ 청계사(淸溪寺)를 방문한 때가 수능이 끝났을 때 였나보다.

▼ 청계사(淸溪寺) 극락보전

▼ 청계사(淸溪寺) 종각

▼ 청계사(淸溪寺) 사인비구가 제작한 동종

▼ 청계사(淸溪寺) 와불

▼ 청계사(淸溪寺) 와불은 돌로 된 것이 아니라서 개금불사를 해도 금새 탈색 되는 것 같다.

▼ 청계사(淸溪寺) 와불 발원... 석가세존 열반대상 조성기도 인연공덕,  국난극복 민족화합 세계평화 법륜상전 발원... 좋은 말씀은 다 적어 놓으셨네요.

▼ 청계사(淸溪寺) 지장전

▼ 청계사(淸溪寺) 삼성각... 나같은 뜨내기들은 삼성각 위주로 다닌다.

▼ 청계사(淸溪寺) 영산전

▼ 청계사(淸溪寺) 지장전과 종각

▼ 청계사(淸溪寺) 감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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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