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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윤 윤임(尹任) 묘

 

파주에 있는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은 한 집안의 묘역이지만 수백년을 내려오면서 인물, 역사성, 묘제 등에 조선시대 분묘의 특징을 한 곳에서 관찰 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래서 이곳은 능원묘 답사객들에게는 꼭 가봐야할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이곳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윤원형, 정난정 묘를 포함 파평윤씨 인물들이 다수 있어서 답사하는 재미도 있다 하겠다. 그런데 이곳에 있어야 할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윤원형과 대립했던 윤임 묘이다.
십수년 전에 윤임 묘가 향동동에 있다고 알려졌는데 그때는 가고싶은 마음이 안들어 미루었는데 얼마전에 향동동이 개발되고 있다고 해 확인해 본 결과 윤임 묘는 그대로 보존된다고 듣고 다음으로 답사를 또 미루었다. 이번에 봄이 되기전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답사를 고양시로 정하고 가는 길목에 있는 윤임 묘를 아침 일찍 찾았다.
3월중순에 대설주의보가 내려서 고민을 좀 했지만 그래도 과감히 출발해서 갔는데 눈발은 세게 내렸지만 막바로 녹아서 길은 미끄럽지 않았다. 그런데 산에는 눈이 제법 쌓였는데 해가 뜨고 나니 바로 녹아서 답사하는데는 별 지장이 없었다.
윤임 묘 진입로를 표시해준 답사기가 하나도 없어서 진입하는데 애를 먹고 무작정 능선을 타고 한바퀴 돌아서 들어갔다. 덕분에 숨은 많이 차고 가시덤불을 헤치는 수고는 했지만 용맥을 밟을 수 있어서 기분은 좋았다.
입수룡을 밟고 내려오면서 보니 윤임 모친 순천부부인 박씨 묘(윤여필 배위)는 그런대로 맥이 들어가고 있지만 윤임 묘로는 전혀 맥이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묘를 이장하면서 모친 곁으로 옮긴다는 하나만 생각했던게 아닌가 싶다. 조금은 움푹 들어간 곳에 윤임과 두 부인의 합장 묘로 되어있다.
묘역에는 묘비가 없고 아래쪽에 신도비가 있는데 글자가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아 일단 사진을 근접촬영하고 집에 와서 살펴보니 윤임 묘가 맞았다. 묘표는 없었지만 느낌상으로 윤임 묘가 맞을거라 판단하고 답사를 진행한 것이다.
윤임은 소윤과의 대립에서 패하고 을사사화로 유배가던 중 사약을 받는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58세였다. 당시 성인이던 그의 아들 흥인(興仁)·흥의(興義)·흥례(興禮) 등 3명도 함께 사형당하였다. 그의 아들들 중 윤흥신과, 나이 어린 서자들, 장남 윤흥인의 세 아들만은 유모와 하인들에 의해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밖에 그의 손자로 윤흥인의 아들 윤호는 중종의 외손녀사위라는 이유로 화를 모면하였다.
자료를 검토하다 발견한 건데 윤임은 전부인 여흥이씨와 3남2녀, 후부인 현풍곽씨와 3남, 측실에서 2남1녀 등 8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들의 이름은 흥(興)자 다음에 인의예지신충효제(仁義禮智信忠孝悌)로 이름을 지었다. 결과적으로 전부인 소생 장남 흥인, 흥의, 흥례는 아버지와 함께 죽임을 당했고, 후처 소생 흥신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우고 죽어서 집안을 복원시키게 된다. 참으로 엉망진창인 가문의 내력이다.
윤임이 사형 당시 부친 윤여필은 80세의 고령으로 처벌을 면했는데 그 아버지의 입장에서 같은 가문에서 피비린내 나는 혈투를 벌인 그곳 선산에 뭍히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런데 윤여필 묘는 지금 윤원로, 윤원형과 지근거리에 뭍혀있다.
뭔가 깨끗하게 정리가 되지 않으면서 실타래처럼 얽힌 인간사가 한 가문을 넘어서 나라 전체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사건들을 되새기면서 답사하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찜찜하니 무거웠다.

 

 

윤임(尹任)
 
인종의 외척이자 대윤의 거두로 소윤(小尹)과 대립하다가 을사사화 때 화를 당했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임지(任之). 아버지는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여필(汝弼)이다. 중종의 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오빠이다. 무과에 급제한 뒤 벼슬이 경주부윤에 이르렀다.
1523년(중종 18)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재직중 왜구의 전선(戰船)을 맞아 싸우다 패하여 충군(充軍)되었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경원대군(慶源大君)을 낳아 왕위계승의 문제가 발생하자 김안로(金安老)와 함께 세자 보호를 주장하여 문정왕후측과 대립했다.
1537년 10월 김안로가 사사되면서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집권하자, 대윤 일파를 이끌며 윤원형의 소윤(小尹) 일파와 대립했다.
1544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형조판서·찬성에 올라 윤원로·윤원형을 파직시켰으나, 이듬해 7월 인종이 경원대군에게 전위하고 죽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이때 윤원로가 "윤임이 임금을 해하려 한다"고 고변했으나, 오히려 윤인경(尹仁鏡) 등의 탄핵을 받아 해남에 유배되어 윤임은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윤원형이 첩 난정(蘭貞)을 통해 문정왕후에게 "윤임이 조카인 봉성군(鳳成君)을 왕에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민다"고 무고하고, "인종이 죽을 당시에 윤임이 계림군(桂林君)을 옹립하려 했다"고 소문을 퍼뜨려 그해 8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남해로 귀양가던 도중 충주에서 사사되었으며, 대윤과 가까웠던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도 모두 숙청되었다. 무골(武骨)로 성격이 호방했으나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임백령(林百齡) 등에게 원한을 샀다. 이이(李珥)는 "임의 죄가 없다"고 한 반면, 이황(李滉)은 "사직(社稷)에 대한 죄가 없지 않다"고 하여 평가가 엇갈리기도 했다. 1577년(선조 10) 세 아들과 함께 신원되었다. 시호는 충의(忠義)이다.<다음백과>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朴氏)
 
순천부부인 박씨는 적개공신, 정난공신, 익대공신으로 판돈녕부사 평양군을 지내고 사후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박중선의 딸이다. 중종 반정 공신인 박원종의 누이동생이다. 딸이 중종의 정비인 단경왕후 신씨의 뒤를 이어 중종의 계비(장경왕후)가 되어 부부인(府夫人)이 되었다. 월산대군부인 승평부부인 박씨는 그의 큰 언니가 되고, 예종의 차남 제안대군 계부인도 그의 여동생이다. 
부군 윤여필이 아들 윤임이 을사사화로 사형을 당한 10년 뒤에 사망했는데 순천부부인은 그 뒤에 사망했는데도 부군 묘역에 들어가지 못하고 아들 윤임 묘 곁에 뭍혀있다. 파주에 있는 부군 윤여필 묘역에는 배위 자리가 빈공간으로 남아있다.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대윤 윤임(尹任) 묘
소재지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239-7(주차:향동동 546)
관리자(연락처) 파평윤씨정정공파

 

▼ 대윤 윤임(尹任) 묘 용맥도

▼ 대윤 윤임(尹任) 묘 용맥... 모친 순천부부인 박씨 묘로 맥이 유입되는데 반해 윤임 묘에는 맥이 없다.

▼ 대윤 윤임(尹任) 묘 찾아가는 길... 향동동 풀내음 공원에서 고압선 변압기 시설을 찾으면 쉽다. 이곳에서 골짜기를 바라보면 폐가가 보이는데 그 앞마당에서 출발하면 된다.

▼ 대윤 윤임(尹任) 묘 찾아가는 길... 폐가 앞마당에서 언덕을 오르면 소로길이 보인다.

▼ 대윤 윤임(尹任) 묘 찾아가는 길... 폐가와 고압선... 

▼ 대윤 윤임(尹任) 묘 찾아가는 길... 오르는 길로 조금 오르면 용척에 닿는데... 앞쪽에 묘역이 보이는 것이 순천부부인 박씨 묘다. 윤임 묘는 부부인 묘 청룡자락에 보면 바로 보인다.

윤임(尹任) 묘는 다른 곳에 매장했다가 복권 후 1590년(선조 23년) 윤임과 전부인 여흥이씨 묘를 이장하면서 윤임을 가운데 묻고 부인을 좌·우에 함께 묻었다. 경기도 고양군 남면 향동리(현, 고양시 덕양구 향동동 239-7번지)에 있다. 1567년(명종 22년) 그의 자손들은 사면(赦免)되고, 선조 즉위 후 1570년에는 윤임의 두 아들이 복권되고 적몰된 가산을 돌려받았다. 1577년(선조 10년)에 신원, 복관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아들 윤흥신이 전사하면서 전공으로 증 병조참의로 추증되었고, 그도 추은(推恩)으로 후에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사에 특별 증직되었다. 1589년(선조 22) 후처인 현풍곽씨가 아들 윤흥신의 임지인 서산군에서 사망하자 그해 8월 남면 향동의 오좌자향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1590년(선조 23) 10월 윤임과 전부인의 묘를 어머니 순천부부인 박씨 묘 아래로 천장하면서 그를 가운데에 묻고 부인은 좌우에 매장하였다. 윤임(尹任)의 묘소 위에는(백호방) 어머니 순천부부인 순천박씨의 묘소가 있고, 부부인의 묘소 아래에는 모친의 몸종의 묘가 있다. 아들보다 오래 살았다는 어머니 순천 박씨 묘가 몸종 묘와 함께 있다. 평생을 수족같이 따랐던 정성이 지극하여 후손들이 특별히 몸종 사후 위 아래로 매장했다고 한다.
후에 임진왜란에 참여한 아들 윤흥신(尹興信)이 공을 세우고 전사하여 선무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고 증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므로, 원종공신의 아버지에게는 1계급 특진되는 전례에 따라 윤임에게도 관작이 추증되어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 관상감사에 추증된 것이다. 1606년(선조 36년) 8월 신도비가 세워졌으며 최립이 글을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김상용이 전서를 찬하였다. 뒤에 파은군(坡恩君)에 추봉되었다.<위키백과>

▼ 대윤 윤임(尹任) 묘 전경... 전부인 여흥이씨와  후부인 현풍곽씨 3인 합장 묘이다.

▼ 윤임(尹任) 신도비... 

▼ 윤임(尹任) 신도비에서 확인한 결과.. 

▼ 윤임(尹任) 묘... 입수룡은 보이지 않고 골이져 있으며... 앞쪽에는 계곡이 열려있다. 

▼ 윤임(尹任) 묘 석물

▼ 윤임(尹任) 묘 도두

▼ 윤임(尹任) 묘 후경... 위로 지나는 전선은 고압선이며... 아래로는 계곡이 열려있다.

▼ 윤임(尹任) 묘에서 바라본 모친 순천부부인 박씨 묘

▼ 윤임(尹任) 묘 동영상

대윤 윤임(尹任) 묘 

 

▼ 윤임(尹任) 모친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朴氏) 묘 전경

▼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朴氏) 묘 

▼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朴氏) 묘표 및 장명등 

▼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朴氏) 묘 문인석

▼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朴氏) 묘  후경... 바로 밑에는 몸종 묘가 있고, 아래쪽으로 후손 묘가 있다.

▼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 박씨(朴氏) 묘 아래에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무덤이 있는데... 바로 순천부부인 몸종 묘로 알려져 있다.

 

윤정준(尹廷俊)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수백(秀伯). 아버지는 윤발(尹王+發)이고, 어머니는 유황(柳璜)의 딸이다. 동지중추부사 윤경(尹瓊)에게 입양되었다.
1608년(선조 41)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당시의 권신 박승종(朴承宗)의 부자가 대대로 교분이 있다 하여 불렀으나 거절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벽동군수로 있을 때 명나라에서 징병을 요구해오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 휘하에 종군하여 요동에 건너가 군량운반의 임무를 다하고 돌아왔다. 그 뒤 박엽(朴燁)의 탄핵을 받아 낙향하였다가 인조반정 이후 다시 관직에 기용되어 옹진현령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부원수 이수일(李守一)의 명을 받고 마탄(馬灘)을 수비하던 중 적의 포로가 되었다. 난군(亂軍)에 합세하라는 이괄·한명련(韓明璉)의 권유에 대하여 도리어 반역의 죄를 꾸짖다가 살해되었다.
신장이 9척이나 되고 용모가 괴위(魁偉)하였으며 항상 호협하고 절개가 있는 선비들과 사귀었고, 특히 김응하(金應河)·박영신(朴榮臣) 등과 가까이 지냈다. 담력이 있는 종 결이(玦伊)가 항상 윤정준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는데, 윤정준의 죽음을 보고 윤정준의 기마(騎馬)를 달려, 옹진에 돌아와 관인에게 말을 맡기고 통곡하면서 바다에 빠져죽었다.
난이 끝난 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파령군(坡寧君)에 봉해졌으며, 김천의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윤임(尹任)의 증손자인 윤정준(尹廷俊) 묘

▼ 윤임(尹任)의 증손자인 윤정준(尹廷俊) 묘 상석... 상석에 묘비명을 새겼다.

▼ 윤임(尹任)의 증손자인 윤정준(尹廷俊) 묘 석물

 

▼  윤정준(尹廷俊) 묘 아래에는 상석에 새겨진 묘비명이 식별이 잘 안되지만... 윤정준의 양부모인 윤경(尹瓊) 묘로 보인다.

  윤정준(尹廷俊) 묘 아래에는 상석에 새겨진 묘비명... 자세히 알수는 없지만 ... 윤정준의 양부모인 윤경(尹瓊) 묘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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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