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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예전에 만들었던 블로그가 틀이 깨지고 카카오에서 운영하는 정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하는 형태대로 유지가 안되서 티스토리로 메인 블로그를 옮겼습니다. 예전 블로그에 있던 자료를 하나씩 옮기고 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은 내용이나 사진이 현재와 맞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이점 이해바랍니다. 추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내용과 사진을 수정할 예정입니다.>
제안대군(齊安大君) 묘(예종의 원자)
아주 오래 전에 포천에 있는 제안대군 묘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묘역을 안내하신 분이 당분간은 묘역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말해서 그동안 잊고 지냈는데 얼마전 블로그를 정리하면서 임시보관함에 보니 2011.12월에 글을 쓰기위해 임시저장해 놓은 것이 보여 이제는 올려도 될 것 같아 꺼내 올린다. 올리면서 검색을 해보니 여러 사람이 이미 올려놓았다. 9년이 지난 다음에 올리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사진 위주로 올리니 이해 바란다.<제 다른 블로그 '좋은터 길라잡이' 2020. 4. 27 올린 글을 옮겨옴>
제안대군 이현(齊安大君 李琄) 제안대군 이현(1466년 2월 13일 ~ 1525년 12월 14일)은 조선의 왕족 종실이다. 그는 조선 제8대 국왕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서 출생하였고 9세 때였던 1474년 5촌 종숙부 정양군 (평원대군의 양자, 1492년에 향년 51세로 훙서)에게 입양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현(琄), 성은 이(李), 자는 국보(國寶), 시호는 영효(靈孝)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세조 12년(1466년) 당시 세자이던 아버지 예종(睿宗)과 세자의 종5품 후궁인 소훈(昭訓) 한씨(안순왕후)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전주 이씨(全州 李氏)다. 예종의 세자빈이던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는 인성대군 이분(李糞)을 낳은 뒤 산후병으로 죽었고, 뒤이어 입궐한 소훈 한씨는 세자의 후궁이었으나 빈의 공상(供上)과 예로 대우받았다. 이복 형 인성대군이 세조 9년(1463년) 3세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에 예종 즉위년(1468년)에 원자(제안군)로 책봉되었다. 예종 1년(1469년) 아버지 예종이 임종할 당시, 왕위승계 1순위였으나 나이가 4세에 불과하다는 이유로 조모 정희왕후가 백부 의경세자의 차남이자 대군의 종형인 자을산군 이혈(성종)을 후계자로 지명하여 왕위승계에서 밀려났다. 성종 1년(1470년)에 제안대군(齊安大君)에 봉해졌다. 봉작을 받기에는 이른 나이였으나, 직계를 대접한다는 방계의 명분이 컸다. 성종 5년(1474년) 증조부 세종의 적7남인 종조부 평원대군 임(琳)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평원대군은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다. 이러한 조처는 성종 초기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가 한명회(韓明澮)의 신권 강화에 맞서,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역모에 휘말려 죽음에 이르기 쉬운 왕실 종친을 보호하기 위한 심모원려(深謀遠慮)의 결과라는 견해도 있다. 첫 부인은 김수말(金守末)의 딸로, 성종 10년(1479년) 이혼하고 박중선(朴仲善)의 딸과 재혼하였으며, 이후에 김씨와 다시 합치게 된다. 그러나 자식을 두지는 못하였다. 연산군의 총희(寵姬) 장녹수는 그의 집 종이었다. 장녹수가 대군의 노비가 된 이유는 대군저의 가노(家奴)와 혼인하였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살았다. 특히 그는 성악(聲樂)을 즐기고 사죽관현(絲竹管絃)을 연주하기를 좋아하는 등 풍류에 심취하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직후에는 특별히 정국원종공신 1등에도 책록되었다. 그는 당질 연산군과 친분이 두터웠으나, 1506년 중종 반정 이후에도 별다른 정쟁에 휘말리지 않고 중종에게도 연산군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당숙부가 되므로 중종 20년(1525년) 60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까지 일생 왕실 종친으로 존대를 받았다. 그의 양아들 이파(李葩)는 생전 왕족으로 예우받지 못하다가 1872년 고종 때 가서 낙풍군(洛豐君)에 추증되었다. 동시에 이파의 아들, 손자들에게도 제안대군의 적손, 적중손, 적증손의 예로써 각각 군의 작위가 추증되었다. 첫부인 김씨와 이혼하고 박씨와 재혼한지 3년 후인 성종 13년(1482),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정광세(鄭光世)가 대군이 전부인 김씨와 은밀히 사통한다고 성종에게 보고하여 그 사실 확인과 처벌이 여러 차례 논해졌다. 박씨의 추문이 불거진 같은 해, 대왕대비 정희왕후와 왕대비 안순왕후는 제안대군의 이혼의사를 성종에게 전달한다. 성종 16년(1485년), 대군은 성종에게 다시 김씨와 재결합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협박조의 내용이었다. 성종은 내키지 않았으나 숙부인 선왕(예종)의 원자였던 대군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처지에 후사마저 끊기게 할 수 없다는 마음의 빚이 있었고, 아들의 고집이 쎄고, 어리석고 병도 있다는 숙모 안순왕후의 당부 또한 더한 탓에 이를 공론화 한다. 이에 신료들은 김씨는 허물이 아닌 질병이 이혼사유였고, 둘째부인 박씨는 이미 죽었으며, 김씨의 질병이 완치됐음을 들어 허락할 것을 청하고 성종은 마침내 이를 수락한다. 대군의 나이 20세 때이다. 연산군 4년(1498년) 어머니 안순왕후의 상을 입은 뒤부터는 홀로 거처했다고 전해진다. 제안대군은 성격이 어리석어서 남녀 관계의 일을 몰랐고, 날마다 풍류잡히며 음식 대접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러나 더러는 행사가 예에 맞는 것이 있으므로 사람들이 거짓 어리석은 체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편 제안대군에게는 자식이 없었는데, 《어우야담》에는 자식을 두면 누를 초래할까 두려워 여색을 가까이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호는 영효(靈孝)이다. 부지런하지 않고도 이름을 낸 것이 영(靈)이고, 어버이를 사랑함이 효(孝)이다. 대군은 행동거지가 엉뚱해 자주 세인들의 웃음거리가 됐으나 홀어머니 안순왕후에게는 효성이 지극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원래는 경기도 성남시 수진동에 있었으나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곡리로 이장했다. 김씨 부인의 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수진동에 있던 박씨 부인 묘는 화장하여 묘를 없애고 사당에 위패만 봉안하고 있다 한다.<위키백과에서 발췌>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예종의 원자) |
소재지 | 경기 포천시 소흘읍 이곡리 산 31-2 |
관리자(연락처) | 전주이씨 |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예종의 원자)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묘는 성남시 수진동에서 이곳으로 이장해 왔다.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당시에는 을씨년 스러웠는데 최근에는 이곳에 펜스를 두르고 관리하고 있다.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표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표
▼ 제안대군(齊安大君) 부인 상산김씨 묘표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장명등...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문인석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우측에 있는 묘는 세종의 적7남 종조부 평원대군 임(琳)의 묘다. 제안대군은 평원대군 임(琳)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평원대군은 요절하여 후사가 없었다.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측경
▼ 부인 상산김씨 묘 후경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후경
▼ 제안대군(齊安大君) 묘 후경
▼ 제안대군(齊安大君) 신도비는 묘역을 오르는 중간 숲속에 있다.
▼ 제안대군(齊安大君) 신도비
제안대군(齊安大君) 묘는 너무 오래된 자료라 포스팅 하는 것을 망설였지만 예전의 모습을 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대로 올렸으니 혹시 현재 다른 모습이나 내용이 잘 못 되었다면 댓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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