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예전에 만들었던 블로그가 틀이 깨지고 카카오에서 운영하는 정책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원하는 형태대로 유지가 안되서 티스토리로 메인 블로그를 옮겼습니다. 예전 블로그에 있던 자료를 하나씩 옮기고 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난 것은 내용이나 사진이 현재와 맞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이점 이해바랍니다. 추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으면 내용과 사진을 수정할 예정입니다.>

 

민무질(閔無疾)-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

 

묘지답사를 하시는 분들 끼리는 대체로 다녀온 곳을 공유하거나 함께 답사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사진을 보면 대략 엇비슷 할 때도 있고 그 시기도 비슷할 때가 많다. 저도 한동안 열심히 묘지 답사를 진행할 때는 몇몇 분들과 함께 하면서 묘지를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약2~3년 전부터는 묘지를 골라서 풍수답사 위주로 하다 보니 수적인 면에서 다소 진척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최근에 후배와 시간을 맞춰 3~4회 답사를 다녀와서 블로그에 올릴 답사 내용이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그동안 답사 필수 코스라고 할만한 곳을 놓친 부분들을 지금 몇 군데 찾아 다니느라 오히려 시간을 많이 뺏기고 있다. 
민무질 묘는 별 의미도 없다고 판단하여 몇 년 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그 인근의 한확 배위 남양홍씨 묘는 여러차례 다녀오면서도 이곳은 그냥 지나쳤었다. 그런데 정작 자주 다녀온 한확 배위 남양홍씨 묘도 블로그에 누락되어 있다. 올린 줄 알고 있었는데 이것도 일이라고 미루다 보면 잊어버리고 못 올린다. 이번에 맘먹고 민무질 묘를 먼저 갔었는데 남양홍씨 묘는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또 못 가고 돌아와서 이것도 인연이 참 깊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민무질(閔無疾)
 
본관은 여흥(驪興). 민적(閔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민변(閔忭)이고, 아버지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민제(閔霽)이며, 어머니는 송선(宋璿)의 딸이다. 태종비 원경왕후(元敬王后)의 동생이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으로 책록되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여성군(驪城君)에 봉해졌으며, 좌군총제(左軍摠制)·우군도총제(右軍都摠制) 등을 역임하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협유 집권(挾幼執權)의 혐의를 받아 참화를 당하였다.
형 민무구(閔無咎)와 함께 연루된 옥은 1407년(태종 7) 7월에 발생하였다. 이듬해 10월의 교서에서 그들의 죄목을 10가지로 열거했는데, 가장 중요한 죄목이 협유 집권(挾幼執權)의 도모였다. 즉, 1402년 왕이 창종(瘡腫)을 앓아 고생하고 있을 때 그들이 몰래 병세를 엿보며 어린 세자를 세우고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다. 이들이 왕의 외척이자 공신의 영예를 누리고도 이러한 의심을 받은 것은 그들의 성격 및 정비(靜妃: 원경왕후)와 태종과의 불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태종의 제1차 선위 파동으로 민무질 형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세자 정혼 문제와도 깊은 관련이 있었다. 세자의 정혼 문제는 정부와 대간의 시비로 발전하여, 1407년 7월 정부와 대간이 개편되어 하륜(河崙)이 좌의정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6일 후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화(李和) 등이 민무질 등을 탄핵하여 옥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화 등이 열거한 민무질 형제의 죄는 선위 파동 때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나기를 은근히 기대하여 협유 집권을 도모한 점과, 이무(李茂)의 집에 가서 왕에 대한 불평을 토로한 것 등이었다.
옥이 발생한 지 2일 후 민무질을 장단(長湍)에 송치하고, 19일 후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환수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다시 대구에 유배시켰다. 민제가 죽고 한 달이 지난 1408년 10월 그들의 죄를 비난하는 교서를 반포하고 곧 삼척진(三陟鎭)에 옮겨졌다. 그 뒤 이무의 옥으로 다시 제주도에 옮겨지고, 조호(趙瑚)의 난언이 드러난 지 2일 만에 성석린(成石璘) 등의 강경한 처단 건의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명하였다.
민씨 형제의 옥을 만들어내고 확대시킨 주동 인물은 이숙번(李叔蕃)이었다. 개국 공신인 이숙번 일파가 고려의 구가세족(舊家世族)인 하륜을 중심으로 한 일파를 제거하려는 정치 파동 속에서 민씨 형제의 옥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종 또한 이 옥을 외척 제거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최대한 이용했다고 볼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민무질(閔無疾) 묘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산 52
관리자(연락처) 여흥민씨

 

 

▼ 민무질(閔無疾) 묘 원경

▼ 민무질(閔無疾) 묘

▼ 민무질(閔無疾) 묘역에 있는 후손들 묘비...

▼ 민무질(閔無疾) 묘 앞에는 후손들 납골묘가 있다.

▼ 민무질(閔無疾) 신도비

▼ 민무질(閔無疾) 신도비 내용

▼ 민무질(閔無疾) 구 신도비 

▼ 민무질(閔無疾) 묘 

▼ 민무질(閔無疾) 묘... 윗쪽에 있는 묘가 배위 청주한씨 묘이다.

▼ 민무질(閔無疾) 묘 

▼ 민무질(閔無疾) 묘 석물

▼ 민무질(閔無疾) 묘 후경.... 저수지가 보기 좋다. 저수지 건너편에 신도비가 있는데 찾지 못했다.

▼ 민무질(閔無疾) 배위 청주한씨 묘 

▼ 민무질(閔無疾) 배위 청주한씨 묘 

▼ 민무질(閔無疾) 배위 청주한씨 묘 입수도두

▼ 민무질(閔無疾) 배위 청주한씨 묘 후경

<제 다른 블로그 '좋은터 길라잡이' 2019. 3. 19 올린 글을 옮겨옴>

 
728x90
반응형
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