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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오래전에 윤증선생 묘를 답사하고 답사기를 쓴 기억이 있는데 최근에 대권후보들 조상 묘를 답사하기 위해 세종시, 논산시, 공주시를 찾으면서 다시한번 윤증선생 묘를 찾았다. 예전에 없던 철망으로 묘역을 둘러싸고 있었는데 아마도 산짐승을 막기위한 방편 같았다. 다행히 열쇠를 잠구진 않아서 답사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뒤쪽 용맥을 밟으며 현무봉으로 조금 올랐는데 미끄럽기도 하고 숨도 많이 차서 중도에 그만두고 도두에서 향법에 맞는지 이기적인 분석을 해보았다.

이곳은 호남 KTX가 앞쪽으로 지나가는데 다행히 안산쪽을 건드리지 않고 건설되었다. 국세가 꽉짜여져 있어서 빈틈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수구 또한 관쇄가 잘 되어있다. 이곳 향지리에서부터 월산천이 시작되는데 빠져나간 물길은 직각으로 꺾여 금강으로 흘러든다.

향선은 언뜻보기에는 안산의 봉우리에 맞춘듯 보이는데 정확히 살펴보면 뒷쪽 조산에 맞췄다. 아마도 이기법을 염두에 두고 쓴 묘역 같다. 살펴보니 축좌미향(丑坐未向)에 물길은 좌선수 곤신파(坤申破)로 88향법 정묘향(正墓向)으로 매김되어 대부대귀(大富大貴)하고 자손이 흥왕하는 향법이다.

평생 20여번 이상 벼슬을 제수받았지만 한번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사양만 했다. 그의 사후까지 좌의정에 증직되었으니 요즘으로치면 기네스북 감이다. 숙종은 그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그를 정승에 임명하고 사후 그를 기리며 시를 지었으니 이 또한 희귀한 일이다. 

우암 송시열과 갈등으로 끝없는 당쟁으로 점철된 그의 행적이지만 스스로에게는 아주 엄격해서 86세에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집안 가묘에 새벽에 직접 제를 올리는 일을 했다하니 그를 따르는 사람이 그만큼 많은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때 조문객이 무려 2300명이었다고 하는 것도 허구가 아닐 것이다. 

요즘 대권정국에서 윤증의 마음을 한번 새겨볼만 하다고 본다.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인(子仁), 호는 명재(明齋)·유봉(酉峰). 성혼(成渾)의 외증손이고, 아버지는 윤선거(尹宣擧)이며, 어머니는 공주 이씨(公州李氏)로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될 때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어 송시열(宋時烈)과 대립하였다.

1642년(인조 20) 아버지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금산(錦山)에 우거하면서 도의(道義)를 강론할 때 함께 공부하며 성리학에 전심하기로 마음먹었다. 1647년 권시(權諰)의 딸과 혼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주자(朱子)에 관해 배웠고, 1657년(효종 8) 김집의 권유로 당시 회천(懷川)에 살고 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주자대전』을 배웠다.
효종 말년 학업과 행실이 뛰어난 것으로 조정에 천거되었고, 1663년(현종 4) 공경(公卿)과 삼사(三司)가 함께 그를 천거하여 이듬 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고 이어서 공조랑·사헌부지평에 계속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82년(숙종 8) 호조참의, 1684년 대사헌, 1695년 우참찬, 1701년 좌찬성, 1709년 우의정, 1711년 판돈녕부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나가지 않았다. 1669년 아버지가 죽자 거상(居喪)을 주자의 『가례』에 의거하여 극진히 하였다. 학질을 앓다가 1714년 정월 세상을 떠났다.

윤증의 이름을 듣고 공부를 청하는 자가 많았는데, 윤증은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워 학자들과 담론하고, 여동래와 함께 『근사록』을 편찬한 일을 말함)를 모방하여 거상 중에 강학(講學)하기도 하였다. 거상이 끝나자 아버지와 큰아버지를 추모하여 종약(宗約)을 만들고, 모임을 결성하여 학사(學事)를 부과하기도 하였다.
1680년 상신(相臣) 김수항(金壽恒)·민정중(閔鼎重)이 숙종에게 상주하여 윤증을 경연(經筵)에 부르도록 청했으며, 나중에는 별유(別諭)를 내려 부르기도 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 때 박세채(朴世采)가 윤증을 초빙하여 같이 국사를 논할 것을 청하고, 부제학 조지겸(趙持謙) 역시 성의를 다해 올라오도록 권하였다. 이로부터 여러 번 초빙되고, 박세채가 몸소 내려와 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윤증은 “개인적 사정 이외에 나가서는 안 되는 명분이 있다. 오늘날 조정에 나가지 않는다면 모르되 나간다면 무언가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옹(尤翁: 송시열)의 세도가 변하지 않으면 안 되고, 서인과 남인의 원한이 해소되지 않으면 안 되고, 삼척(三戚: 김석주(金錫胄)·김만기(金萬基)·민정중(閔鼎重)의 집안)의 문호(門戶)는 닫히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의 역량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가. 내 마음에 할 수 없을 것 같으므로 조정에 나갈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박세채는 이 말을 듣고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최신(崔愼)이 송시열을 변무(辨誣)하는 것을 핑계로 윤증의 서신을 공개하면서 윤증이 스승을 배반했다고 하였으며, 또 상신 김수항·민정중 등도 윤증이 사감으로 송시열을 헐뜯었다고 상주하였다. 이로부터 선비 간에 논의가 비등하게 일어나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송시열을 지지하는 자는 노론이 되고 윤증을 지지하는 자는 소론이 되었다.
윤증이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아버지 윤선거가 윤증에게 송시열의 우뚝한 기상을 따라가기 힘드니 송시열의 장점만 배우되 단점도 알아두어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있다. 윤선거는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을 송시열의 단점으로 보고, 여러 번 편지를 보내 깨우쳐 주려 하였다. 또한 윤휴(尹鑴)와 예송 문제(禮訟問題)로 원수지간이 되자 송시열과 화해시키려고 하였는데, 송시열은 선거가 자기에게 두 마음을 가진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윤선거가 죽은 후 1673년(현종 14) 그는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을 가지고 송시열을 찾아가서 묘지명을 부탁하였다. 그 때 송시열은 강도(江都)의 일(병자호란 때 윤선거가 처자를 데리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청나라 군사가 입성하자 처자와 친구는 죽고 윤선거만 진원군(珍原君)의 종자(從者)가 되어 성을 탈출한 사실)과 윤휴와 절교하지 않은 일을 들먹이며, 묘지명을 짓는데 자기는 선거에 대해 잘 모르고 오직 박세채의 행장에 의거해 말할 뿐이라는 식으로 소홀히 하였다.
윤증은 죽은 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고 하여 고쳐주기를 청하였으나, 송시열은 자구만 수정하고 글의 내용은 고쳐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사제지간의 의리가 끊어졌으며, 윤증은 송시열의 인격 자체를 의심하고, 송시열을 ‘의리쌍행(義利雙行), 왕패병용(王覇幷用)’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윤증은 사국(史局)에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일을 변명하고, 다시 이이(李珥)가 초년에 불교에 입문한 사실을 인용하여 이이는 입산의 잘못이 있으나 자기 아버지는 처음부터 죽어야 될 의리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유생들이 궐기하여 선현을 모독했다고 윤증을 성토함으로써 조정에서 시비가 크게 일어났다. 송시열이 변명의 상소를 올려 죄의 태반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고 그를 전과 같이 대우하지 말라는 교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것을 전후하여 사림과 간관 사이에 비난과 변무의 상소가 계속되고, 양파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집의 김일기(金一夔) 등의 상소로 관작이 일시 삭탈되었다가 중전 복위를 즈음하여 숙종의 특명으로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사간 정호(鄭澔) 등이 다시 상소하여 윤증이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헐뜯었으나 숙종은 정호를 벌주며, “아버지와 스승 중 어느 쪽이 더 중한가. 그 아버지의 욕됨을 받는 그 아들의 마음이 편하겠는가.”라고 꾸짖었다.

윤증이 죽은 뒤 1년이 지나서, 유계가 저술한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정호가 쓰면서 그를 비난하자 다시 노론·소론 간의 당쟁이 치열해졌다. 결국 소론 일파가 제거되고 윤증과 윤증의 아버지의 관직이 추탈당했으나, 경종 즉위 후 소론이 집권하면서 1722년(경종 2) 소론계 유생 김수구(金壽龜, 황욱(黃昱) 등의 상소에 의해 복관되었다. 충청남도 홍주의 용계서원(龍溪書院), 노성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전남 영광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5월 정조 때 왕명으로 삭탈관직되었다가 1782년 회복된다. 이후 계속 그와 그의 아버지 윤선거의 관작을 추탈하라는 상소가 고종 때까지 계속되었다.<위키백과에서 발췌하여 삽입>

저서로는 『명재유고(明齋遺稿)』·『명재의례문답(明齋疑禮問答)』·『명재유서(明齋遺書)』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공주시 향토문화유적기념물 제28호
문화재명칭 윤증 묘소(尹拯 墓所)
소재지 충남 공주시 계룡면 향지리 산11-11
관리자(연락처) 파평윤씨노종파대종회

 

▼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용맥과 물길

▼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원경과 3D지도

▼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좌향과 수구처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는 축좌미향(丑坐未向)에 수구는 좌선수 곤신파(坤申破)로 88향법 정묘향(正墓向)으로 매김되어 대부대귀(大富大貴)하고 자손이 흥왕하는 향법이다.

▼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선생 묘... 묘역에 철망으로 둘러쌌는데 아마도 짐승들을 막기위해 설치한듯 보인다. 참배객들은 문을 열고 들어가서 보고 나올 때 문을 닫아달라고 안내문에 적혀있다.

▼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문인석, 장명등도 없고 오로지 망주석과 상석만 있다.

▼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안내문..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8호

▼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비... 묘비(墓碑)에는 '유명조선징사파평윤공휘증지묘(有明朝鮮徵士坡平尹公諱拯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윤증(尹拯)선생은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묘비를 세우지 말라하셨다 한다. 그래서인지 후손들은 묘비를 세울수도 그렇다고 안세울수도 없는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이런 고민 끝에 나온 아이디어라고 할까? 비문 아래에 이렇게 적혀 있다.  "노서(魯西·윤선거) 선생 묘(墓)에서 석호(石湖·윤문거) 선생께서 쓰신 13자를 따서 옮겼다.' 라고 써져 있다. 즉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묘비에서 13자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 윤증(尹拯)의 부친 윤선거의 묘비를 함께 비교해 보시길...

▼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망주석

▼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입수도두와 뒤로 보이는 현무봉

▼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현무봉을 오르려고 조금 올라갔지만 미끄럽기도 하고 숨도 차서 그냥 내려왔다.

▼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후경... 언뜻 보기에 향선이 앞쪽의 봉우리에 맞췄을거라 생각했는데 안산 너머 솟아오른 탐랑에 맞추어져 있다. 이기법적인 고려가 있었던듯 보인다.

▼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후경

▼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안산과 조산...

 

▼ 명재(明齋) 윤증(尹拯) 묘 동영상

 

 

명재(明齋) 윤증(尹拯)선생은 관직에 한번도 나가지 않았지만 왕으로부터 20여번이나 관직이 주어졌고 노론,소론으로 나뉠적에는 소론의 영수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다. 죽어서 조문객이 2300여명이나 되었다는 것은 그의 학문, 인품 등이 그만큼 훌륭했다는 방증이 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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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