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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임(金銋) 선생(先生) 신도비(神道碑)와 묘역(墓域)
충남 논산시와 세종시 답사를 다녀왔는데 실은 요즘 대권 주자로 한창 주가가 오른 분의 조상 묘를 답사하기 위해 왔었다. 묘를 둘러보고 동선상에 있는 다른 묘를 보다가 충남 문화재자료로 등재된 묘가 있어서 둘러본 것이다. 후손들이 재물이 넉넉하다면 선조의 묘를 잘 관리하고 인근 문전옥답을 아직도 보존하고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묘소를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 손으로 넘어가 묘역 접근도 쉽지가 않다.
이곳에는 김임선생 신도비와 묘역, 아들 김수문의 묘가 있는데 신도비의 비신은 사라지고 귀부만 현재 남아있다. 김수문 묘역을 올라가려고 길을 들었는데 철조망이 처져있고 접근로가 통제되어 무척 애를 먹다가 진입로 초입에 있는 신도비만 돌아보고 내려왔다.
묘역 뒤를 돌아 아들 신도비, 묘역으로 돌아나오는데 용은 무난하지만 나가는 물을 바라보고 묘역이 조성되어 재물은 힘들것으로 여겨진다.
김임(金銋) 선생(先生) 신도비(神道碑)와 묘역(墓域) 김임선생신도비는 조선시대 문신 김임의 묘 앞에 그의 삶을 기록하여 세운 비이다. 김임의 정확한 출생과 사망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중종 때의 유학자로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강령현감을 지낸 김장생(金莊生)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김임은 1513년(중종 8)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그의 아들 김수문(金秀文, 1504-1568)은 제주목사와 평안도병마절도사를 지낸 무신으로 왜구와 오랑캐의 침략을 막는 공을 세웠다. 신도비의 받침은 거북 모양이며 비의 머리는 두 마리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형상이다. 김수문이 소세양(蘇世讓)에게 비문을 받아 1561년(명종 16)에 신도비를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김임의 행적이, 뒷면에는 독특하게도 고령 김씨 족보가 새겨져 있다. 김임은 노성에 살면서 중종 때 진사로서 호조판서를 증직 받았는데, 만석꾼 부자로 인근 30리가 모두 그의 소유지라서 산림재상(山林宰相)이라 불렸다고도 한다.<김임선생신도비 안내문> |
문화재지정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363호 |
문화재명칭 | 김임(金銋) 선생(先生) 신도비(神道碑)와 묘역(墓域) |
소재지 | 충남 논산시 노성면 호암리150-1(주차: 호암리 152-2) |
관리자(연락처) | 고령김씨 |
▼ 김임 선생 신도비와 묘역
▼ 김임 선생 묘
▼ 김임 선생 신도비 안내문
▼ 김임 선생 신도비
▼ 김임 선생 묘
▼ 김임 선생 묘 전경
▼ 김임 선생 묘 석물
▼ 김임 선생 묘 망주석이 특이하다.
▼ 김임 선생 묘비
▼ 김임 선생 묘 측후경
▼ 김임 선생 묘 입수도두
▼ 김임 선생 묘 후경... 앞쪽 명당이 경도되어 재물에는 미흡하다.
▼ 김임 선생 묘에서 아들 김수문 묘로 들어가는 용맥
▼ 아들 김수문 묘로 가는 용맥상에서 바라본 김임 선생 묘
▼ 김임 선생 묘 동영상
김수문(金秀文) 조선 중기 제주목사를 역임한 무신. 본관은 고령. 자는 성장(成章). 아버지는 김임(金銋)이다. 중종 때 무과에 급제하였다. 야인(野人: 여진인)들이 함경북도 종성에 침입하여 사람들을 납치해가자 1535년(중종 30) 영건만호(永建萬戶)로서 전투에 참가하여 끌려갔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1546년(명종 1) 동래부사에 부임하던 해 관리로서 근면, 절약하고 특히 치민(治民)에 힘써 품계가 올라갔으며, 1549년(명종 4)에는 김해부사가 되어 구황(救荒)에 힘써 포상을 받았다. 1555년 3월 남치근(南致勤)[?~1570]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부임 직후인 5월에 조정에 보내는 보고문 관계로 임금의 뜻을 거스르게 하였다고 제주목사인(濟州牧使印)을 판관인(判官印)으로 강등하여 사용하도록 하였다. 1555년(명종 10) 6월 제주목사 재임 중 왜구들이 80여 척을 거느리고 장흥·강진 등 8진(鎭)을 침범하고 화북포에 상륙하는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이때 남해안에 침입하여 대패하고 쫓겨 가던 왜적 1천 명이 제주를 기습하자 정예병 70명을 뽑아 적진으로 쳐들어가 많은 적을 사살하고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 전공으로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을묘왜변으로 흉흉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교리 윤의중(尹毅中)[1524~?]을 제주로 파견하여 목사인(牧使印)을 다시 사용하도록 하였다. 1556년(명종 11)에도 여러 차례 왜구의 침입을 잘 막고 선박 6척을 포획하는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는데 명종의 배려에 감열하여 겨울 연희각(延曦閣) 동북쪽에 망경루(望京樓)를 지어 어의(御意)에 보답하는 뜻을 나타냈다. 1557년(명종 12) 10월 청렴하고 매사에 조심성이 있고 재략(才略)이 있으며, 변방을 맡아 명성과 치적이 있어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떠나니 세인이 훌륭한 목민관이라 칭하였다. 1558년(명종 13)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1565년(명종 23) 한성판윤에 특진되었고, 1565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여러 번 만주인의 침입을 격퇴하여 북변방어에 공을 세웠다. 평소 책읽기를 좋아하였으며, 탐라에서 왜적을 몰아내고, 서북으로는 만주인을 물리치는 등 변방을 지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
▼ 김임 선생 아들 김수문 신도비 귀부
▼ 김임 선생 아들 김수문 신도비 귀부 설명...
명종(名鐘)10년 을묘(乙卯) 왜변(倭變)시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왜구(倭寇)를 대파(大破)한 공(功)으로 한성판윤(漢城判尹)에 특진(特進)되고 장재(將才)로 평안병사(平安兵使)를 세 차례나 역임(歷任)하면서 수차(數次) 호인(胡人)침략(侵略)을 격퇴(擊退)하였고 진관법(鎭管法)인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진상(秦上)하여 각도(各道) 군병관(軍兵管)에 진포(陳布)하였으며 선(選)청백리(淸白吏)하다.
후(後)에 왜인(倭人)이 신도비(神道碑)를 없애버린 후 전설(傳說)에 의하면 거북의 등 부분(部分)에 금이 가면서 붉은 피가 나왔다고 전(傳)해 오고 있다.
1980. 10. 18
▼ 김수문 묘
▼ 김수문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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