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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윤동도(尹東度) 묘

 

논산 파평윤씨 묘역을 찾았는데 영의정 윤동도 묘가 보이지 않는다. 자료를 찾아보니 문중 묘역 백호 너머에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 뒤에 있었다. 재실에서 터덜터덜 걸어서 그곳까지 가보았다. 백호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뒤쪽에 묘비가 있는 묘 하나가 보인다.

영의정을 했으니 신도비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찾아봤는데 안 보인다. 이 또한 자료를 봤더니 없는 게 맞는 모양이다. 뒤산으로 오르는데 묶어놓은 강아지가 연신 짖어댄다. 유난히 강아지하고 인연이 박해서 뒤쪽으로 살살 접근해서 묘역으로 올랐다.

묘역은 아주 단촐해서 묘비와 상석, 망주석, 석양 한쌍이 전부다. 고관대작들에 흔하게 보이는 문인석이나 묘표도 안보인다. 어떤 사연이 있는듯 하여 자료를 살펴봐도 특이한 게 없다. 아마도 무덤 주인공의 성격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윤동도(尹東度)
 
윤동도(尹東度, 1707년(숙종33) ~ 1768년(영조44)는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이다. 사도세자에게 호의적이었으며 당색으로는 소론 계열이었다.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중(敬仲), 호는 남애(南厓)·유당(柳塘). 장령 윤순거(尹舜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제학 윤진(尹搢)이고, 아버지는 판서 윤혜교(尹惠敎)이며, 어머니는 이익수(李益壽)의 딸이다.
1744년(영조 20) 진사가 되고 이듬해 해주판관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745년 사서·부수찬·헌납·교리를 거쳐 1748년 부교리·수찬, 1750년 장령, 1751년 부응교·도승지·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다음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그 이듬해 병으로 인하여 체개(遞改)되고 1754년 대사성·대사간·부제학·승지를 거쳐 1758년 이후 대사헌·이조참판·부제학·청풍부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61년에 우의정에 올라 이듬해 함경남도병마절도사 윤구연(尹九淵)의 처벌에 반대, 용서를 청하였다가 파직되고 다시 3일만에 복직되었다.
나경언의 벽서 사건 때(1762년), 벽서 사건의 주모자로 안성저 사람을 지목했고, 안성 사람들은 윤동도의 아들 윤광유(尹光裕)가 사주했다고 지목했다.[1] 이 소식을 들은 윤동도가 사임 표하였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누명임을 알고 윤동도에게 수서를 내려 위로했다. 세자는 안성저 사람의 자백이 사전에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1764년에 좌의정, 1766년에 영의정이 되었다. 1768년 영중추부사로서 죽었다. 시호는 정문(靖文)이다.<위키백과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윤동도(尹東度) 묘
소재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산 1-3(주차:병사리 18-5)
관리자(연락처) 파평윤씨노종파대종회

 

▼ 영의정 윤동도(尹東度) 묘 원경... 마을 뒷동산에 있다.

▼ 영의정 윤동도(尹東度) 묘

▼ 영의정 윤동도(尹東度) 묘비... 시호를 받기 전에 세운 묘비다. 뒤면을 봤더니 1775년8월에 세운 것으로 나온다. 시호를 정문(靖文)으로 받았으니 아마도 시호는 1775년 이후에 받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묘비가 상당히 깨끗하다.

▼ 영의정 윤동도(尹東度) 묘 망주석과 석양

▼ 영의정 윤동도(尹東度) 묘 후경

▼ 영의정 윤동도(尹東度) 묘 청룡방향, 백호방향

 

▼ 영의정 윤동도(尹東度) 묘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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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