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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세 선생 묘소 일원(尹昌世先生墓所一圓)

 

근자에 대선이 진행되면서 풍수학회에서 유력 대선주자들의 선영과 생가 등을 답사하고 있다. 우리 학회에서도 선답으로 논산에 있는 파평윤씨 세거지를 답사하고 세종시의 윤석열 조상 납골묘를 다녀왔다.

답사지를 정리해서 올리려고 하다보니 차일피일 미뤄져 앞으로는 신속성을 고려해서 사진 위주로 올리니 이해 바란다.

 

 

윤창세 선생 묘소 일원(尹昌世先生墓所一圓)
 
윤창세 선생 묘소 일원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싸우다가 진중에서 전사하여 훗날 이조참판으로 추증된 윤창세의 묘소가 제일 먼저 자리 잡은 곳으로,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와우형(臥牛形)으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에 묘소가 마련된 이후 윤창세의 자손들은 노종 5방파로 발전하였다. 묘역에는 노종 5방파 직계 선조들의 묘소와 6기의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는 타성의 묘소도 자리하고 있는데, 이는 외손봉사의 흔적이다.
윤창세의 묘비는 파평윤씨 선영의 하단에 서향으로 세워져 있다. 묘비명은 김유가 찬하고, 윤순거가 서했으며, 김광현이 전한 것이다. 비는 1634년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는 212㎝, 폭 80㎝, 두께 26.5㎝이다. 대좌는 방형으로 윗면에 복련을 조각하였으며, 비신을 받기 위한 홈이 마련되었다.
비신은 대리석재로 앞면에만 음서가 되어 있고, 비명은 ‘증이조참판윤공묘비명(贈吏曹參判尹公墓碑銘)’이라 쓰여 있는 전액과 함께 일대기가 적혀 있다. 이 비신은 대좌와 이수의 홈에 맞추어져 있다. 이수는 운룡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마리의 용이 구름을 헤치고 하나의 여의주를 차지하려는 모습이다. 이수의 크기는 비신의 폭보다는 넓으며 대좌의 폭보다는 좁은 편이다. <중략>
유연의 묘소는 묘비 앞면에 ‘통정대부류공지묘부인남양홍씨부(通政大夫柳公之墓夫人南陽洪氏祔)’라 각자되어 있다. 비석의 규모는 높이 140㎝, 폭 63.5㎝, 두께 15㎝이다.
윤창세선생 묘소 일원은 1992년 10월 28일에 논산시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노성 지역의 파평윤씨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논산 파평윤씨(坡平尹氏)

 
윤신달을 시조로 하고 윤돈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남도 논산시 세거 성씨.
파평윤씨는 약 1500년경 승지공 윤돈(尹暾)의 장인인 유연(柳淵)이 살고 있던 이산현 득윤면 당후촌으로 이거하면서 노성 지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통정대부 첨정이었던 유연은 일찍이 이산현 득윤면 당후촌에 터전을 잡고 부유하게 살며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 유서봉(柳瑞鳳)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두 명의 딸만이 남게 되었다. 그중 첫째 딸은 한여헌에게 출가하여 그 후손들이 연산면 백석리 텃골에서 누대를 살게 되고, 둘째 딸은 윤돈에게 출가하여 득윤면 당후촌에 살게 된다.
이후 윤돈의 아들 윤창세에게 외가의 모든 전답이 분재되어, 윤창세가 이관 받은 전답으로 외손봉사를 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그러한 전통이 남아 있다. 이렇게 이거한 파평윤씨들은 윤창세가 노성면 병사리 비봉산에 터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노성면에 세거하게 되었고 윤창세의 아들들이 자라 파평윤씨 노종5방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파평윤씨들은 노성면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시켜 나갔고 특히 ‘충청5현’으로 대표되는 윤선거를 비롯하여 소론의 영수로 추대되는 명재 윤증 등 많은 명현을 배출하게 되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문화재지정 논산시 향토유적 제10호
문화재명칭 윤창세 선생 묘소 일원(尹昌世先生墓所一圓)
소재지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산1-3
관리자(연락처) 파평윤씨노종파대종회

 

▼ 윤창세 선생 묘소 일원(尹昌世先生墓所一圓) 재실...

 

윤창세(尹昌世)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흥백(興伯). 고려 태사 윤신달(尹莘達)의 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대사성 윤탁(尹倬)이고, 아버지는 윤돈(尹暾)이다. 윤창세는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첫째는 윤수(尹燧)로 설봉공파를 이루었고, 둘째는 윤황(尹煌)으로 문정공파, 셋째는 윤전(尹烇)으로 충헌공파, 넷째는 윤흡으로 서윤공파, 다섯째는 윤희(尹熺)로 전부공파를 이루었다. 5형제 가운데 윤수와 윤황, 윤전은 문과에 급제하였다. 5형제의 슬하에서 손자 21명, 증손자 51명을 두는 등 크게 번창하여 윤창세의 5형제 계파를 ‘오방파’라고 부른다.
윤창세는 효성이 지극하여 처가와 외가의 대소사는 물론 흉재나 환란을 당한 마을 사람들에게도 온정을 베풀어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성품이 순후하고 언행이 방정하며 효행이 지극하기로 소문이 났다. 어머니가 병에 걸려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자 때가 아닌데도 열심히 수박을 구하다가 끝내 얻지 못하였으므로 죽을 때까지 수박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 병환에 거북이 고기가 좋다는 의원의 말을 듣고 한겨울에 들에 나가 지성으로 구하였더니 홀연히 거북이가 얼음 위로 나타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후 아버지의 병세가 악화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켰으나 이윽고 죽자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이에 그의 지극한 효성과 이웃을 보살핀 마음씨와 행적으로 인하여 자손들은 그를 효렴공(孝廉公)이라 불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노성으로 급히 귀향하여 팔자기를 세우고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므로, 팔자군(八字軍)으로 알려졌다. 진중에서 유행병에 걸린 동료를 구하다가 전염되어 악화되어, 1593년 51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묘소는 노성면 병사리 파평윤씨 선산에 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 파평윤씨 노종파 묘소 용맥도

 

▼ 윤창세 선생 묘소 일원(尹昌世先生墓所一圓)... 맨 위쪽이 입향조이신 부친 윤돈 선생 묘(尹暾先生墓), 그 아래가 윤창세 묘, 세번째가 아들 윤수, 맨 아래쪽이 손자 윤순거 묘

▼ 파평윤씨 논산 입향조 윤돈 선생 묘(尹暾先生墓)

▼ 파평윤씨 논산 입향조 윤돈 선생 묘(尹暾先生墓) 후경... 물이 모여드는 곳에 사격마져 훌륭해 인물과 재물이 넉넉한 곳이다. 최초에 이런 자리를 찾아 세거지로 삼았다는 것은 최초 능력의 소유자다. 

 

▼ 윤창세 선생 묘비명(尹昌世先生墓碑銘)

▼ 참판공 윤창세 선생 묘(尹昌世先生墓)

 

윤수(尹燧)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명숙(明叔), 호는 설봉(雪峰). 할아버지는 윤돈(尹暾), 아버지는 윤창세(尹昌世)이다. 훗날 설봉공파를 이루었다.
1590년(선조 2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3년 아버지 윤창세가 죽자 시묘를 살았다. 1600년(선조 33)에 능참봉(陵參奉)을 제수 받았으며, 160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에 임명되고 이어 승문원박사·영변부판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관직을 내놓고 돌아왔는데, 이후 형조좌랑·형조정랑·형조겸춘추관기주관·합천군수·충청도 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능성현령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에 나아가 고을을 잘 다스렸으므로 여러 차례 포상을 받았다. 3년 뒤 관직을 내놓고 돌아왔다가 통례원상례·영해부사를 거쳐 죽주부사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용모와 자태가 탁월하고 마음가짐이 관대하고 너그러웠으며, 항상 겸손하여 남에게 양보하면서도 스스로의 뜻을 지키는 것이 확고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경학(經學)에 전념하여 출세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장인이 사술을 배우도록 권고하였으나 그는 “대대로 유학을 이어받았는데 쓸데없는 기술을 배워 빨리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은 수치일 뿐이니, 입지(立志)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되돌아볼 뿐입니다.”라며 더욱 분발하여 학업에 열중하였다.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파평윤씨 선산에 묘소가 있다. 사후에 도승지로 증직되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윤순거(尹舜擧)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노직(魯直), 호는 동토(童土). 아버지는 대사간 윤황(尹煌)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로 당대의 명유인 성혼(成渾)의 딸이다. 큰아버지 윤수(尹燧)에게 입양되었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여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 아버지 윤황이 척화 죄로 귀양 가고, 작은아버지 윤전(尹烇)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 기간 고향인 노성면 병사리에 거주하면서 보인당을 중건하고 노서당을 세워 여러 선비들과 강학하며 향음주례를 행하여 고을 강학 분위기를 일신하였다. 또한 종손으로서 종사에 관심을 기울여 조상을 받들고 자제를 교육시키는 종약을 제정하고 종학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645년(인조 23)에는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고, 이어 상의원주부·형조좌랑·안음현감·의령현감 등을 지냈다. 의령현감으로 재직할 때 이황(李滉)과 남효온(南孝溫)의 사우를 건립하였으며, 1655년(효종 6) 종부시주부·공조정랑을 거쳐 금구현령으로 나아갔다. 1660년(현종 1) 영월군수가 되어 『노릉지(魯陵誌)』를 편찬하고 단종의 사묘인 지덕암(旨德庵)을 중건하였다. 1665년 사헌부장령에 제수되었으나 오르지 않았다. 그 뒤 사직서령·세자익위사익위·군자감정·예빈시정·상의원정 등을 지냈다.
외삼촌인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을, 강항(姜沆)에게서 시를,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를 배웠고, 아버지 윤황과 작은아버지 윤전으로부터 척화 사상을 이어받았다. 스승 강항을 위하여 「강감회요서(綱鑑會要序)」·「수은강공행장(睡隱姜公行狀)」을 저술하고, 강항이 포로 생활을 하면서 견문을 기록한 『간양록(看羊錄)』 등을 편찬하여 존왕양이(尊王壤夷)의 정신을 고취하였다.
1660년 영월군수로 재직하면서 단종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수집하여 『노릉지』를 편찬함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사회 질서인 군신 관계를 전제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학자로서 이이(李珥)의 『증손여씨향약(增損呂氏鄕約)』의 영향을 받아 노성향약을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저서로 『동토집(童土集)』·『노릉지』가 있다. 철원에 ‘심원사취운당대사비(深源寺翠雲堂大師碑)’의 글씨가 전한다. 묘소는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 파평윤씨 선산에 있다. 연산의 구산서원(龜山書院), 영광의 용계사(龍溪祠), 금구의 구성서원(九成書院)에 배향되었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 설봉공 윤수 묘(尹燧 墓)

 

▼ 동토공 윤순거 신도비(尹舜擧 神道碑)

▼ 동토공 윤순거 묘(尹舜擧 墓)

 

윤전(尹烇)
 
본관은 파평(坡平). 초명은 윤찬(尹燦), 자는 정숙(靜叔), 호는 후촌(後村)이다. 병사(兵使) 윤선지(尹先智)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돈(尹暾)이며, 아버지는 증참판(贈參判) 윤창세(尹昌世)이며, 어머니는 청주경씨(淸州慶氏)로 부제학 경혼(慶渾)의 딸이다. 아우는 문정공(文正公) 윤황(尹煌)이다. 부인은 해평윤씨(海平尹氏)로 첨지중추부사 윤효지(尹曉之)의 딸이며, 아들은 윤원거(尹元擧)이다.
윤전은 1610년(광해군 2)에 과거에 급제한 후 승문원박사, 전적(典籍), 감찰(監察)을 거쳐 1615년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위경(李偉卿) 등에 탄핵을 받아 파면되고 사판(仕版)에서 삭제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경기도사(京畿都事)로 복직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곧 인조가 있는 공주로 가서 공조정랑이 되었으며, 환도 후 1626년(인조 4) 지평이 되었다. 이 때 대사헌 박동선(朴東善)과 함께 관가와 사대부가의 연료 독점에 대한 백성의 원성을 대변하였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시종(侍從)하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호소사(號召使) 김장생(金長生)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였다. 강화로 들어가 분병조정랑(分兵曹正郎), 공조정랑,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역임하고, 이후 익산군수를 지냈다.
1633년 종묘서령(宗廟署令),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 때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으로 빈궁(嬪宮)을 배종(陪從)해 강화에 들어갔다. 그러나 성이 함락되자 식음을 폐하고 송시영(宋時榮), 이시직(李時稷) 등과 함께 자결을 결의하고 시도했으나 적병에 의해 피살되었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논산시 노성면 병사리에 있다.
사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충렬사(忠烈祠), 연산(連山)[현 충청남도 논산시의 옛 지명]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후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에 사우가 세워져 매년 제향되고 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서 인용>


윤진(尹搢)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경(子敬), 호는 덕포(德浦). 아버지는 장령 윤순거(尹舜擧)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관찰사 이춘원(李春元)의 딸이다.
1652년(효종 3)에 생원시에 합격, 그 뒤 10년이 지나 빙고별제(氷庫別提)와 종부직장(宗簿直長)·인의(引儀)·상의주부(尙衣主簿) 등을 지냈다. 1666년(현종 7)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성균전적을 거쳐 병조좌랑·정언·지평·수찬·헌납 등을 지냈다.
1673년 부교리에 승진되었고, 다음 해 능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79년(숙종 5) 사간에 임명되고 다음 해 순창군수에 부임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렸다. 1681년 박태손(朴泰遜)과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예조참의에 발탁되었다.
1689년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남구만(南九萬)이 어전에서 “윤진은 학문과 인격이 훌륭하니 특별히 정성과 예로써 대우하여야 됩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에 윤진의 덕망을 짐작할 수 있다. 1696년 경기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대신들의 진정으로 체대를 허락하여 전직에 유임되었다.
윤진은 관직에 있을 때 붕당을 타파시킬 것, 언로를 열 것, 구황·휼민에 힘쓸 것 등 여러가지 시의적절한 정책건의를 많이 하였다.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덕포유고(德浦遺稿)』가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인용>

 

▼ 충헌공 윤전 신도비(尹烇 神道碑)

▼ 충헌공 윤전 묘(尹烇 墓)

 

▼ 덕포공 윤진 신도비(尹搢 神道碑)

▼ 덕포공 윤진 묘(尹搢 墓)

윤창세 선생 묘소 일원(尹昌世先生墓所一圓)에는 이밖에도 여러 기의 묘가 있지만 생략한다. 풍수적으로 분석을 해볼까 하다가 이미 많은 분들이 언급을 해서 생략한다. 세부적으로 보면 미흡한 부분도 있겠지만 이 정도로 부귀가 넉넉한 터를 소점한 것은 집안의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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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