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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척기(俞拓基) 묘

 

철원에 최근 한탄강 물윗길이 임시개통되고 주상절리길 잔도가 개통되었다고 해서 주말을 이용해 인근 묘역 답사와 병행하여 찾았다. 철원은 군사지역이 많아서 네이버나 카카오맵에서 위성사진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찾아가는데 애를 먹는 곳이다.

영의정 유척기(俞拓基) 묘는 앞서 다녀오신 분들이 어렵게 찾았다고 해서 미리 도상연습을 충분히 하고 찾아서인지 어렵지 않게 답사를 하였다. 뒤에 오시는 분들을 위해 답사코스를 자세히 안내해 드리니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저도 앞선 사람들의 답사기, 사진 등을 이용하면서 크게 감사하다고 글을 남기지는 않지만 자료를 이용할 때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철원지방이나 기타 비무장지대를 답사할 때 유용한 지도가 구글지도이다. 해상도는 떨어지더라도 우리가 원하는 답사코스, 유적지 등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 현장에서 답사지를 놓치거나 도저히 찾지 못할 때 앞선 사람의 자료가 있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번 답사에서도 여러번 기존 자료를 이용했다.(네이버 블로그 '개미실사랑방') 항상 감사드리고 있다.

유척기(俞拓基) 묘는 진입로가 없어서 접근하는데 애를 먹는다. 그래서 지도를 면밀히 분석해서 비교적 오르기 쉬운 코스로 안내를 해드리니 뒤에 가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유척기 묘를 답사하고 나와서 부친 유명악 묘를 답사하는데 비교적 찾기 쉽다. 다만 이 일대가 가축을 키우고 있어서 전염병 발생할 때는 출입이 통제되니 이 점 유의하면서 답사하면 좋을듯 보인다. 유명악 묘 입구(조금 떨어진 곳인데 출입로가 전혀 달라 멀리 보인다.)에 신도비가 있는데 사실 이것은 신도비가 아니라 묘갈이다. 아마도 품계가 신도비를 세울 정도가 아니다 보니 신도비 형식을 갖췄지만 전자에 묘갈명이라 썼을 것으로 보인다. 아들이 힘이 있을  때 부친의 묘역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유척기(俞拓基)
 
유척기(俞拓基)[1691~1767]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경상북도 포항], 자는 전보(展甫), 호는 지수재(知守齋),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대사헌을 지낸 유철(兪撤)이 할아버지이고, 청주목사를 지낸 유명악(兪命岳)이 아버지이다. 1714년(숙종 40)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에 제수된 이후 정언(正言)·수찬(修撰)·이조정랑(吏曹正郎)·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집권으로 이조참의(吏曹參議)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1726년 승지(承旨)로 참찬관(參贊官)을 겸하다가 경상도관찰사·양주목사(楊州牧使)·함경도관찰사·도승지(都承旨)·평안도관찰사·호조판서·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유척기는 대신(大臣)의 기풍을 지닌 노론 중에 온건파였고, 당대의 명필가이자 금석학(金石學)의 권위자였다. 유척기 묘비(兪拓基 墓碑)는 1769년(영조 45) 10월 건립되었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사거리에서 텃골로 향하는 지방도 제463호를 따라가면 논골다리를 지나 왼쪽의 곰농장 이정표로 올라가다가 축사 오른쪽 산에 있다.  유척기 묘비는 비의 머리 부분에 개석을 씌운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로 개석은 팔작지붕 위에 보주(寶珠)가 있으며, 문양이 없는 장방형 대석 위에 비가 세워져 있다. 전체 높이는 282㎝이고, 비석 높이는 150㎝, 폭은 61㎝, 두께는 55㎝이다. 개석과 대석은 화강암이고 비신은 대리석이다.  유척기 묘비에는 ‘유명조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치임봉조하 시문익 유공척기묘(有明朝鮮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副使致任奉朝賀諡文翼俞公拓基墓)[정경부인 평산신씨부좌(貞敬夫人平山申氏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유척기 묘비는 비의 마멸 상태는 양호하나 총탄 흔적이 왼쪽에 9곳 있고, 뒷면에 15곳이 있다. 
유척기는 영의정까지 지낸 저명한 정치가이자 당대의 명필이었고 금석문의 대가였다. 말년에 철원군 갈말읍 군탄리에 있는 한탄강 순담에서 요양하였다고 전한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유명악(兪命岳)
 
유명악(兪命岳)[1735~]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기계(杞溪)[지금의 경상북도 포항], 자는 군사(君四)이다. 대사헌을 지낸 유철(兪㯙)이 아버지이고, 영의정을 지낸 유척기(俞拓基)가 아들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宋時烈)이 화를 당하자 송시열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170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그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고 지방의 수령을 거쳐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유명악 묘갈(兪命岳墓碣)은 1735년(영조 11) 8월 건립되었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 삼거리에서 문혜5리 텃골[밤나무골]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면 좌측으로 논골로 들어가는 작은 길이 있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면 유명악의 후손인 유웅(兪熊)이 운영하는 농장이 나오는데, 유명악 묘갈은 농장의 우사 앞에 있다. 
유명악 묘갈은 비의 머리 부분에 개석을 씌운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로 개석은 팔작지붕이며 대석은 문양이 없이 단조롭다. 전체 높이는 276㎝이고, 비석 높이는 186㎝, 폭은 75㎝, 두께는 30㎝이다. 
유명악 묘갈 전액(篆額)에는 ‘목사증판서 유공묘갈명(牧使贈判書兪公墓碣銘)’이라고 적혀 있고, 앞면에는 ‘유명조선국통훈대부청주목사청주진병마절도사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유공묘갈명병서(有明朝鮮國通訓大夫淸州牧使淸州鎭兵馬節度使 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俞公墓碣銘幷序)’라고 새겨져 있다. 이재(李縡)가 찬하고 김진상(金鎭商)이 썼으며 유척기(俞拓基)가 전(篆)하였다.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 지혜동에 유명악의 묘소가 있는데 크게 성토한 묘역에는 많은 석물들과 행적비가 세워졌으며 동쪽 산기슭에 유명악 묘갈이 있다. 비석의 상태는 풍화로 인해 마모가 심하나 판독은 가능하다. 
유명악의 아들 유척기는 영의정을 지낸 금석문의 대가로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 주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유명악은 유척기의 아버지이고 유명악의 묘소가 철원군에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문화재지정 미지정
문화재명칭 유척기(俞拓基) 묘(父:유명악(兪命岳)묘)
소재지 강원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 산 140-47(父:문혜리 산 140-90)
관리자(연락처) 기계유씨

 

 

 

유척기 묘 찾아 가는 길

 

▼ 유척기(俞拓基) 묘와 부친 유명악 묘 위치

▼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밭이 나오는데 밭 끝에 주차

▼ 주차하는 곳에 전봇대가 있는데 전봇대 번호를 올린다.

▼ 개울을 건너 가면 계곡이 나오는데... 여름에는 가시덤불을 헤치면서 가야하니까 막대기나 등산용 스틱을 준비해서 길을 내면서 천천히 올라가야 한다.

▼ 계곡을 거의 오르다보면 안부가 보이는데 그 옆으로 상석만 보이는 묵묘가 위치한다. 이런 곳을 우리는 과룡(過龍)이라 해서 불가장지에 속한다. 

▼ 능선을 따라 오르면 유척기(俞拓基) 묘에 갈 수 있다.

▼ 유척기(俞拓基) 묘 앞에는 최근에 이장을 한 묘가 한 기 있다.

 

 

유척기(俞拓基) 묘

▼ 유척기(俞拓基) 묘 원경

▼ 유척기(俞拓基) 묘

▼ 유척기(俞拓基) 묘 봉분이 허물어지고 잔디가 모두 죽었다. 소나무가 너무 가까이 자라면 잔디가 자랄 수 없다. 상석에도 묘비명을 기록하고 있다.(朝鮮國領中樞府事致仕諡文翼兪公墓)

▼ 유척기(俞拓基) 묘비

▼ 유척기(俞拓基) 묘비명... 유척기 묘비명은 유척기가 벼슬에서 물러난 뒤 71세에 쓴 자찬 묘비명이다.

유척기의 자찬묘지명은 네 글자씩 하나의 구를 이루고 두 구마다 끝에 압운한 운문 형식이다. 운자는 네 구나 여섯 구마다 바꾸는 환운의 방식을 사용했다. 한문 원문은 간결한 어구를 사용하고 고풍의 관명이나 용어를 사용해서 장중한 맛을 지닌다.
유척기는 자찬묘지명을 지은 6년 뒤 1767년 10월 29일에 춘추 77세로 작고하여, 1768년 정월에 지금의 강원도  철원 지혜동 신좌의 언덕에 안장되었다. 비는 1805년(순조 5년) 10월에 아들 유언흠(兪彦欽)이 추록하여 세웠다. 글씨는 석봉 한호(韓濩)의 글자를 집자했다.
유척기의 자찬묘지명에는 두 번에 걸쳐 추록이 이루어졌다. 1805년 10월 아들 유언흠이 비를 세우면서 추록한 것과 1821년 2월 증손 유춘주(兪春柱)가 추록한 것이다.<심경호 역 '내면기행'에서 발췌>

▼ 유척기(俞拓基) 묘 석물... 높은 데 있어서 인지 문인석은 없고 문인석 대신에 석양 한쌍이 있다.

▼ 유척기(俞拓基) 묘 청룡방, 백호방

▼ 유척기(俞拓基) 묘 입수도두... 맥은 위이굴곡​(逶迤屈曲)하며 잘 내려오고 있다.

▼ 유척기(俞拓基) 묘 후경

▼ 유척기(俞拓基) 묘 동영상

 

 

 

부친 유명악(兪命岳) 묘 

 

▼ 유척기(俞拓基) 부친 유명악(兪命岳) 묘

▼ 유명악(兪命岳) 묘

▼ 유명악(兪命岳) 묘 석물

▼ 유명악(兪命岳) 묘비

▼ 유명악(兪命岳) 묘 후경

▼ 유명악(兪命岳) 묘는 묘 뒤에서 들어가는 것이 편리하다.

▼ 유명악(兪命岳) 묘갈과 유명악 묘 위치

▼ 유명악(兪命岳) 묘 신도비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묘갈이라 적혀있다. 아마도 신도비 세우는 요건을 갖추지 못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신도비는 숙종 이후에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한 사람이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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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