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헌종의 국구 익풍부원군 묘를 찾아 남양주로 나섰다. 얼마 전에 익풍부원군 묘를 찾아 인터넷을 뒤졌는데 묘역에 부원군의 부친, 후손들의 묘는 보이는데 정작 본인의 묘는 없다고 후배가 전한다. 일단 문중 묘역으로 향했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데 간밤에 약간의 눈이 내려 비포장도로에는 조금씩 쌓여있다. 겨울 답사길은 항시 미끄럼을 주의해야 한다. 차를 운전하다보니 눈이 조금이라도 내린 날에는 늘 조심스럽다.
서울-양양고속도록 톨게이트 옆으로 돌아 묘역을 오르니 3단으로 되어 있고 각 단마다 2기의 묘가 있는데 상단에는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 쌍분, 중단에는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종석(洪鍾奭)과 그의 아들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순형(洪淳馨) 묘, 하단에는 홍인표, 홍성주의 묘가 있다. 그런데 찾고있는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는 보이지 않는다.
아침 일찍 찾은 곳이라 사진 찍는다고 손도 얼고 눈도 살짝 내려 미끄러운데 찾는 묘가 없으면 엄청 실망하게 된다. 일단 내려와서 주변 지도를 꼼꼼하게 살펴봐도 마땅한 묘가 보이질 않는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와서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고 남양홍씨 문중에 문의를 드렸는데 문중이 커서 돌아돌아 겨우 담당하시는 선생님과 통화가 이뤄졌는데 그분 말씀이 내가 찾아 갔던 곳에 계시다는 것이다. 그분이 직접 부원군 묘역을 이장했다고 하신다. 나중에 묘역 직계후손인 홍세기(홍성주님 子)님과 통화 한 후에 정확한 위치와 사연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익풍부원군 홍재룡은 남양홍씨(당홍계) 남양군파로 세파로는 해봉공(23세 홍명원)파로 이어져 내려온다. 원래 묘역은 양평 양수면 부용리(지금의 영의정 정찬손 묘역)에 있었는데 그곳에 신도비와 묘비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묘역을 지금의 남양주 월문리로 옮기면서 신도비는 땅에 묻었는데 어디에 묻었는지 당시에 작업하신 분이 안계셔서 현재 소재를 파악중에 있다고 전한다.
묘역은 다시 서울-양양고속도로가 나면서 현재의 위치로 헌간공 홍기섭 이하 6대의 묘를 이장하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비만 파손되어 세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현재 상단에 두기의 묘 중 백호방에 있는 묘는 선친 홍기섭 묘이고 청룡방 묘가 바로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묘이다. 조만간 묘비를 세울 예정이다고 전해왔다.
내용을 알고나니 조금 허무한 면도 있으나 후손께서도 신도비와 묘비를 세우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안타까워 하시고 계신듯 보인다. 익풍부원군 후손들이 주로 외아들로 이어져서 후손이 많지 않다고 하신다. 하루빨리 신도비를 다시 찾아 묘역에 세워졌으면 하고 바래본다.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홍재룡(洪在龍, 1794년 11월 6일(음력 10월 13일) ~ 1863년 2월 21일(음력 1월 4일[1]))은 조선의 문신이자 국구이다. 헌종의 장인으로, 헌종의 계비 효정왕후의 아버지이다. 1794년(정조 18) 11월 6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조판서를 지낸 홍기섭이며, 어머니는 장지면(張至冕)의 딸이다. 본관은 남양(당홍계)이며, 자는 경견(景見)이다. 1831년 3월 6일(순조 31년 음력 1월 22일) 아버지 홍기섭의 배임지인 함열현에서 딸(훗날의 효정왕후)을 낳았다. 1835년(헌종 1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대호군이 되었으며, 1838년 8월 18일(헌종 4년 음력 6월 29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열린 한림소시에 뽑히고, 1842년 3월 15일(헌종 8년 음력 2월 4일)에는 홍문록에 선발되었다. 이어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병조판서, 금위대장 등 수많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843년(헌종 9년) 헌종의 정비 효현왕후가 훙서한 이듬해인 1844년(헌종 10년) 순원왕후에 의해 그의 딸이 헌종의 계비로 간택되었으며, 이때 홍재룡은 영돈녕부사 및 익풍부원군에, 아내 안씨는 연창부부인에 봉해졌다. 또 아버지 홍기섭의 자급도 한 단계 올라갔다. 이후 철종 연간에는 실록청지사가 되어 《헌종실록》의 편찬 책임자가 되었다. 그 외에도 훈련대장 및 어영대장, 수원부유수 및 광주부유수 등을 지내다가, 1863년 2월 21일(철종 14년 음력 1월 4일)에 향년 7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부인 죽산 안씨와의 사이에서 딸 효정왕후를 비롯해 2남 2녀를 두었다.<위키백과>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산 342-14(주차 월문리 448-1) |
관리자(연락처) | 남양홍씨 남양군파(해봉공종중회)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가는 길...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묘비가 없이 있다보니 처음에는 부 홍기섭의 쌍분으로 알았다. 그런데 후손과 통화 후 확인해본 결과 홍재룡 묘는 쌍분의 청룡방에 있는 묘로 밝혀졌다.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망주석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측후경... 묘역에 이끼가 잔뜩 끼어있다.
▼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 묘 후경... 부친 묘 봉분이 뒷쪽으로 날카롭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이는 바람이 이곳에서 부딪히고 있다는 뜻이다.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 홍기섭(洪耆燮, 1781년 ~ 1866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공조판서(工曺判書)이다. 헌종비 효정왕후의 할아버지이며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아버지이다. 본관은 남양이다. 집이 너무 가난하여 그의 집 가마솥을 훔치러 왔던 도둑 유씨가 도리어 옆전 꾸러미를 놓고 갔다는 이야기가 명심보감에 전해져 온다 |
明心寶鑑(명심보감) 廉義篇(염의편) 홍기섭(洪耆燮)과 유가(劉哥) 洪耆燮少貧甚,無料一日早,婢兒踊躍獻七兩錢,曰:「此在鼎中,米可數石,柴可數馱。天賜!天賜!」公驚曰:「是何金? 」即書失金人推去等字,付之門楣而待。俄而姓劉者來問書意,公悉言之。劉曰:「理無失金於人之鼎內,果天賜也。盍取之? 」公曰:「非吾物何? 」劉俯伏曰:「小的昨夜為竊鼎來,還憐家勢蕭條而施之。今感公之廉價,良心自發,誓不更盜,願欲常侍,勿慮取之。」公即還金曰:「汝之為良則善矣。金不可取。」終不受。後公為判書,其子在龍為憲宗國舅。劉亦見信,身家大昌。 洪耆燮이 젊었을 때 가난하여 매우 무료(無聊)하였는데, 하루는(어느 날) 아침에 어린 계집종이 기쁜 듯 뛰어와 돈 일곱 냥을 바치며 말하기를, “이것이 솥 안에 있었으니, 쌀이 몇 섬일 수 있고, 나무가 몇 바리일 수 있습니다. 참으로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놀라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된 돈인가?” 하고 곧 돈 잃은 사람은 와서 찾아가라는 글을 써서 대문에 붙여 놓고 기다렸다. 얼마 후 유가(劉哥)라는 사람이 찾아와 글 뜻을 묻자, 공은 자세히 그 내용을 말해 주었다. 유가가 말하기를, “이치상 남의 솥 안에 돈을 잃는 일은 없으니, 참으로 하늘이 주신 것입니다. 왜 취하지 않으십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나의 물건이 아닌데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유가가 엎드려 말하기를, “소인이 어젯밤에 솥을 훔치러 왔다가 도리어 가세(家勢)가 너무 쓸쓸한 것을 불쌍히 여겨 이것을 놓고 돌아갔습니다. 지금 공의 청렴(淸廉)에 감동하고 양심이 저절로 우러나 도둑질을 아니할 것을 맹세하고, 앞으로는 항상 옆에서 모시기를 원하오니 염려마시고 취하소서.” 하였다. 공이 곧장 돈을 돌려주며 말하기를, “네가 착하게 된 것은 좋으나 이 돈은 취할 수 없다.” 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뒤에 공은 판서가 되고 그의 아들 재룡(在龍)은 헌종(憲宗)의 국구(國舅)(임금의 장인)가 되었으며, 유가(劉哥) 또한 신임을 얻어 몸과 집안이 크게 번창하였다.<동양고전종합 明心寶鑑(명심보감) 24.廉義篇(염의편)에서 인용> |
▼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 익풍부원군 홍재룡의 선친이다.
▼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 묘
▼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 묘비
▼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 묘 측후경... 수기가 많아 이끼가 끼어있고 묘 봉분이 많이 깎여있는 것은 바람의 영향으로 좋지 못하다.
▼ 헌간공(獻簡公) 홍기섭(洪耆燮) 묘 후경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종석(洪鍾奭)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종석(洪鍾奭) 홍종석(洪鍾奭 1814년∼1864년.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초명은 석종(奭鍾)이고 자는 군필(君弼)이다. 본관은 남양(南陽[唐]). 증조부는 홍병채(洪秉寀)이고, 조부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홍기섭(洪耆燮)이며, 부친은 금위대장(禁衛大將)과 총융사(摠戎使) 등을 역임한 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이다. 누이는 헌종(憲宗) 계비인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 洪氏)이다. 모친은 안광직(安光直)의 딸이고, 부인은 김수현(金守鉉)의 딸이다. 1851년(철종 2) 신해별시문과(辛亥別試文科)에 병과(丙科) 1등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금성현령(金城縣令), 안악군수(安岳郡守) 등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남겼다. 1862년(철종 13)에는 대사성(大司成)을 지냈으며 뒤에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이어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승진하였다. 시호는 효정(孝貞)이며, 묘는 남양주 와부읍 월문리에 있다. 아들 홍순형(洪淳馨)은 1874년(고종 11)에 갑술증광문과(甲戌增廣文科)에 을과(乙科) 5등으로 급제하였다. <묘비, 양주군지 외 인터넷에서 발췌> |
▼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종석(洪鍾奭) 묘...익풍부원군(益豊府院君) 홍재룡(洪在龍)의 아들이며, 헌종 계비 효원왕후의 오빠가 된다.
▼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종석(洪鍾奭) 묘
▼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종석(洪鍾奭) 묘비
▼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종석(洪鍾奭) 묘 후경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순형(洪淳馨)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순형(洪淳馨)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여문(汝聞). 서울 출신. 홍재룡(洪在龍)의 손자로, 판서 홍종석(洪鍾奭)의 아들이며, 헌종의 비인 효정왕비(孝定王妃)의 조카이다. 1874년(고종 11) 증광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대교에 임명되었다. 이어 장령·부응교를 거친 뒤, 1877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고, 여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882년 개성부유수로 승진하였다가, 1884년 이조참판·홍문관부제학, 1887년 성균관대사성, 1888년 대사헌·규장각직제학이 되었다. 예조참판을 거친 뒤, 1890년 지경연사(知經筵事)·형조판서, 1891년 한성부판윤·예조판서, 1892년 개성부유수를 역임하였다. 1893년 황해도관찰사로 재직중, 황주에서 향촌 세력과 향리 등의 탐학에 견디다 못한 백성이 민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리고, 난을 이끈 이관석(李寬石) 등을 엄벌에 처한 뒤 귀양보냈다. 또한 탐학하여 백성을 괴롭힌 자들을 엄하게 징계하였다. 1894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한 뒤 이 해 갑오경장으로 관제가 개혁되자 8월 광주부유수(廣州府留守)를 거쳐, 1895년 왕태후궁대부가 되었다. 그 뒤 국장도감제조와 장례원경(掌禮院卿)·명헌태후궁대부(明憲太后宮大夫)를 역임하였다. 1901년 판돈녕부사·명헌태후궁대부, 1902년 태의원경(太醫院卿)·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표훈원부총재(表勳院副總裁), 1903년 태의원경, 1904년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표훈원부총재·판돈녕원사·홍문관학사·규장각학사·시강원일강관(侍講院日講官)·중추원찬정(中樞院贊政)을 거쳤다. 1906년 이후에도 궁내부특진관과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일강 관직을 여러 차례 맡았다. 1908년에는 교육·위생·환난을 서로 구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관진방회(觀鎭坊會)의 찬무장(贊務長)을 맡아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 정부가 주는 남작 작위를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 |
▼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순형(洪淳馨) 묘... 부친 홍종석 묘와 나란히 있다. 묘를 이장하면서 선대 두분씩 모신 것으로 보인다.
▼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순형(洪淳馨) 묘
▼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순형(洪淳馨) 묘 망주석... 한쪽은 총탄에 깨져있고... 한쪽은 기울어져 있다.
▼ 예조판서(禮曹判書) 홍순형(洪淳馨) 묘 후경
▼ 하단에 있는 후손들... 홍순형의 子 홍인표...
▼ 홍인표의 子 홍성주... 남양주에서 저랑 통화하신 분은 홍성주님의 아드님이신 홍세기님이시다. 이자리를 빌려 감사드립니다.
▼ 남양주 남양홍씨 남양군파(해봉공종중회) 묘역 전경... 아침 일찍 해뜨기 전에 참배해서 사진이 흐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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