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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관 터(太平館址)

 

태평관(太平館)은 조선시대 명나라 사신(使臣)을 접대하던 숙소로, 왕이나 왕자가 사신들을 대접하기 위해 다례와 하마연(下馬宴), 익일연(翌日宴) 등의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태평관의 유래는 고려시대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태평관으로 고쳐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정동행성은 고려시대 원나라 세조(世祖)가 일본 정벌을 위해 세운 것이었으나, 원나라가 물러간 뒤에 중국 사신의 숙소로 바뀌었다. 태평관 터는 그 태평관이 있던 장소이다. 태평관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듬해인 1395년(태조 4)에 태조가 1,000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건립하였다. 《궁궐지(宮闕志)》 등의 기록에 1423년(세종 5)에 중국 사신 양선(楊善)을 영접하러 왕이 이곳에 행차하였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또 1455년(세조 1)에도 상왕인 단종(端宗)과 세조(世祖)가 함께 태평관에서 열린 중국 사신의 연회에 참석하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원병을 이끌고 온 이여송(李如松)이 남별궁(南別宮)을 숙소로 삼은 후부터 남별궁이 중국 사신이 머무는 숙소로 주로 사용되었고, 태평관은 격이 떨어지는 중국의 관리들을 접대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중국 사신이 조선으로 들어오면 영접사를 파견하는 한편 국왕은 백관을 영솔하고 모화관(慕華館)으로 가서 중국 사신을 맞이한 뒤, 경복궁에서 칙서나 조서를 받았다고 한다. 이어 왕은 태평관으로 거동하여 하마연(下馬宴)을 베풀고 다음 날에는 또 익일연(翌日宴)을 열었다. 왕은 판서급에 해당하는 고위 관원을 관반(館伴)에 임명하여 중국 사신이 환국할 때까지 필요한 사항을 관장하게 하였다. 중국 사신이 임무를 마치고 서울을 출발할 때에는 국왕이 다시 태평관으로 거동하여 전별연(餞別宴)을 베풀고 모화관으로 가서 전송하였다. 중종(中宗)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성혼식이 열리기도 하였으며, 선조(宣祖) 때에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이곳에서 성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태평관은 서부(西部) 황화방(皇華坊), 즉 현재의 중구 대한상공회의소 근처에 있었다.<서울 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태평관 터(太平館址) 표석

▼ 태평관 터(太平館址) 표석... 표석의 디자인이 왜이리 촌스럽게 보일까?

▼ 태평관 터(太平館址) 표석... 신한은행 본점 뒤편 화단에 있다.

▼ 태평관 터(太平館址) 표석... 식객촌 옆에 있다.

▼ 태평관 터(太平館址) 표석 위치

▼ 태평관 터(太平館址) 표석... 식객촌 방향

▼ 옛날 태평관 터(太平館址) 표석... 오펠리스 예식장 건물에 표석이 있어서... 특이하다고 많이들 얘기했었다.

▼ 서울 중구 서소문 일대 표석 위치

▼ 태평관 터(太平館址) 표석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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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