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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은 조선 중기의 명장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있으면서 조선군을 이끌고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격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이순신은 1545년(인종 1)에 한성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이정(李貞)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8세 되던 1572년(선조 5)에 훈련원 별과(別科)에 처음으로 응시했다가 말에서 낙마하여 골절상을 입고 낙방하였고, 1576년(선조 9)에 다시 이곳 훈련원에서 식년시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는데, 이때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16년 앞둔 해였다.

 

이후 1591년(선조 24) 47세의 나이로 현재의 여수 지역에 그 본영이 있었던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의 절도사로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나중에 벌어질 임진왜란에서 크게 활약할 조선 수군의 대표적인 전투선인 판옥선(板屋船) 20여 척을 운용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해에 이순신의 수군은 옥포해전(玉浦海戰), 사천해전(泗川海戰),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 등을 승리로 이끌며 왜군의 해상 활동을 저지하였고,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직전인 2월에 통제사에서 해임되어 아무런 직책 없이 일개 평민의 신분으로 백의종군(白衣從軍)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 해 7월 정유재란 발발과 함께 삼도수군통제사 예하의 조선 함대가 칠천량해전(漆川梁海戰)에서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으면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9월 명량대첩(鳴梁大捷)에서 13척의 조선 함대로 133척의 왜군 함대에 맞서 싸워 31척을 격파하며 승리하여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

 

1598년(선조 31) 정유재란이 끝나던 해 조선 수군과 왜의 수군이 마지막으로 맞붙은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이순신은 왜군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1643년(인조 21) 인조가 그에게 ‘충무(忠武)’라는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1688년(숙종 14) 명량대첩비가 건립되었고, 1706년(숙종 30) 충청남도 아산에 이순신을 기리는 현충사(顯忠祠)가 건립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순신 생가 터는 이순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8-1에 ‘충무공 이순신 나신 곳’ 표지석과, 중구 초동 명보극장 앞에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으나, 1956년 한글학회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답사를 통해 중구 을지로18길 19 일대가 이순신의 생가 터인 것으로 밝혀졌다.<서울 중구역사문화자원에서 인용>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명보아트시네마(구.명보극장) 앞에 있다.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명보아트시네마 쪽을 바라보고...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길 건너편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부근 인도에 새겨진 이순신 출생 표지석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부근...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부근 풍경

▼ 서울 중구 을지로 부근 표석 위치

▼ 충무공 이순신 생가터(忠武公李舜臣生家址)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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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방인야초